민주신문=이한호 기자|수익성 악화로 퇴출됐어야 할 한계기업들이 금융지원 등으로 연명하면서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한국은행의 분석이 나왔다.
팬데믹 이후(2022~2024년) 이러한 한계기업들이 제때 정리되고 정상기업으로 대체됐다면 국내총생산(GDP)이 0.4% 더 성장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은 12일 발간한 'BOK이슈노트: 경제위기 이후 우리 성장은 왜 구조적으로 낮아졌는가?'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보고서는 1990년대 이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 등을 거치며 한국 경제의 성장세가 구조적으로 둔화된 원인을 '민간 투자 부진'에서 찾았다.
특히 소수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 기업의 투자 부진이 자금난과 같은 금융 제약보다는 근본적인 '수익성 악화'에 기인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단순히 돈을 푸는 것만으로는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영업이익이 감소한 기업은 증가한 기업에 비해 장기적으로 투자, R&D, 고용 모든 면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수익성이 악화된 한계기업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퇴출되는 '정화 메커니즘(cleansing effect)'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위기 시기에는 부실기업이 정리되고 그 자리를 혁신적인 신생기업이 채워야 경제 전체의 역동성이 높아지는데, 한국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19년 사이 퇴출 위험이 큰 기업의 비중은 전체의 3.8%로 추정됐지만, 실제로 퇴출된 기업은 절반 수준인 2.0%에 그쳤다.
만약 이들이 정상적으로 퇴출되고 그 자리를 정상기업이 메웠다면, 해당 기간 국내 투자는 3.3%, GDP는 0.5% 추가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러한 현상은 팬데믹 이후 더욱 심화됐다. 2022~2024년 동안 퇴출 고위험기업 비중은 3.8%로 비슷했지만, 실제 퇴출된 기업은 0.4%에 불과했다. 이 기간에 정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투자는 2.8%, GDP는 0.4% 더 증가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연구진은 경제의 구조적 부진을 완화하기 위해 한계기업이 자연스럽게 퇴출되고 신생기업의 진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경제의 역동성 증대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 금융지원은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이나 혁신적인 초기 기업 등에 선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규제 완화를 통해 신산업 투자를 촉진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는 개별 기업 구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산업 생태계 전체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주력 산업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규제 완화를 통해 신산업에 대한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제품·서비스 수요를 창출해 우리 경제의 미래 동력을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