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서종열 기자] 

지난 2012년 삼성그룹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이건희 회장 일가 모습.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서현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 삼성전자

25일 타계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하지만 가족사를 살펴보면 크고 작은 분란으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특히 형제들과 이어졌던 끝없는 분란에서 가슴 아픈 가족사까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삶이었다. 

 

◇ 잇단 전학에 유학까지, 외로운 소년 이건희

이 회장은 1942년 1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였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날로 성장하던 삼성상회의 경영에 매진하느라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경남 의령으로 보내야 했다. 

이후 네 살이 돼서야 가족들과 다시 살게 됐고, 여섯 살 무렵이던 1947년에는 서울로 상경해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곧바로 터진 6·25동란으로 인해 다시 가족들은 흩어져야 했다. 

전쟁 이후에도 이 회장은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이병철 회장이 사업으로 거처를 자주 옮기면서 어린 이건희 역시 초등학교만 6곳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홀로 일본에 유학까지 가야했다. 

이런 유년시절은 이 회장을 말수 없는 내성적인 소년으로 만들었다. 이 회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됐고, 친구도 없다보니 혼자 생각을 자주 깊게 하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학교 1년을 마친 이 회장은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사대부고로 진학했다. 이 때 레슬링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 회장이 추후 레슬링협회장이 된 것도 고교시절 인연 때문이다. 

그러나 레슬링은 부상이 잦을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다. 이에 집안 어른들이 레슬링을 그만두라고 권유했고, ‘소년 레슬러’ 이건희는 조용히 고교를 졸업한 후 1961년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에 입학하며 다시 유학길에 오른다. 

와세다대를 졸업한 이 회장은 이번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때 전공은 경제학이었지만, 부전공으로 ‘매스컴’을 선택하면서 추후 동양방송에 입사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대학원을 졸업한 이 회장은 1966년 한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결혼했다. 상대는 잘 알려진대로 결혼상대는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당시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 씨(현 리움미술관 관장)였다. 

결혼과 동시에 이 회장은 삼성그룹 비서실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하면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이듬해인 1968년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했다. 첫 공식 직함이었다. 

그리고 1971년 삼성그룹 미래를 바꾼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 이병철의 유언장 “후계자는 3남 건희”

당시 삼성그룹 내부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1966년 터진 한국비료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고 이맹희 제일제당 고문이 그룹경영을 맡았지만, 이 회장의 작은 형이던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은 당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게다가 형을 마치고 나온 이창희 회장이 다시 투서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야말로 삼성그룹은 정쟁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 삼성그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는 이때 기획됐다. 

한비사건으로 인해 미래성장동력을 잃었던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점찍고 사업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병철 회장의 유언장이었다. 

1976년 공개됐던 유언장에는 “후계자를 3남 건희로 정했으며,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가라”는 내용이 담겼다.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젊은 이건희를 낙점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가 2세 형제들 간 교류는 거의 끊어지듯 했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자 3남 이건희는 예정대로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큰형인 이맹희 고문과의 불화가 시작됐다. 곧 이병철 회장의 상속분을 놓고 지루한 법정 소송이 이어졌다. 

실제 2012년 이맹희 고문은 이병철 회장의 차명계좌 상속분을 이건희 회장이 독식하려 했다며 1조 원대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한 뒤 상고 포기로 마무리됐다. 

 

◇ 이건희 회장의 아픈 손가락들

자녀들도 이건희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이 회장은 슬하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해 1남 3녀를 뒀는데, 이중 막내딸인 이윤형씨가 미국 유학 도중 사망했다. 

여기에 장남인 이재용 부회장과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역시 모두 이혼이란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1998년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뒀지만, 2009년 이혼했다. 

이부진 사장은 평범한 집안의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과 결혼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올해 초 재판을 거쳐 결국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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