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석탑 환수운동 시작…일본 오쿠라 문화재단은 환수에 미온적인 입장

일본 오쿠라호텔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이천오층석탑

[민주신문=양희중 기자]경기도 이천시청 청사 건물 옆 잔디밭에는 ‘이 자리는 이천 오층석탑이 놓일 자리입니다’라는 글이 적힌 표석이 하나 서 있다. 

이는 바로 일본이 강탈해 간 이천 오층석탑의 귀향을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이천시와 이천오층석탑 되찾기 범시민운동추진위원회(현재 환수위원회)가 2009년 5월에 세운 것이다.

2008년 이천지역에서 환수위원회가 결성돼 석탑 환수운동이 시작됐지만, 석탑을 가져간 일본 오쿠라 문화재단의 미온적인 태도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환수위 관계자는 “오쿠라 문화재단이 다른 문화재를 주면 석탑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반환하지 않으려고 말도 안 되는 조건만 되풀이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쿠라 문화재단과 환수위측은 협상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오쿠라호텔은 호텔 재건축을 위해 지난해 4월 석탑을 해체한 후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오쿠라 호텔측은 2019년 새로 준공한 뒤 이천 오층석탑을 다시 호텔 내에 전시할 것이라고 했다.

석탑이 해체된 지금이 반환할 최적의 타이밍이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다시 신축 호텔 내에 전시되면 반환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천 오층석탑이 원래 자리였던 경기도 이천을 떠난 지는 올해로 100여년이 됐다.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높이 6.48m의 방형석탑으로 균형미가 뛰어난 이천의 대표적인 석조문화재다. 문헌에도“망현산 기슭 이천향교 서남쪽으로 인접해 있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두 개의 석탑이 마주보고 있었다”는 고증이 있다. 

지금의 양정여자중학교 일대에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정사각형의 기단석과 탑신부로 이루어진 3층석탑 1기가 현지에 남아 있다. 다른 1기의 석탑이 바로 일본 동경의 오쿠라 박물관에 있는 이천오층석탑으로 6.48m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보급의 아름다운 자태를 갖춘 문화재이다.

일제는 조선의 상징이며 정궁인 경복궁을 훼손하고 궁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한일강제병합 5주년(1915년)을 기념한다며 조선물산공진회(일종의 산업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람회장을 장식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서 많은 유물들을 수탈해 가는데 경기도 이천에서는 안흥사지오층석탑과 함께 이천 오층석탑을 빼앗아 갔다. 

1918년, 오쿠라슈코칸(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이미 빼앗아간 자선당과 어울릴 석탑을 요청하자 조선총독부는 이천 오층석탑의 가치를 폄하하며 1918년 10월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이후 도쿄 시내 오쿠라호텔 뒤뜰에서 평양 율리사 터에서 반출한, 같은 고려 시대 석탑인 팔각오층석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게 됐다. 

이후 2003년 재일교포 김창진씨가 이천문화원에 석탑환수운동을 제의해 2008년 8월 환수위가 결성됐다. 환수위와 이천시가 서명운동, 탑돌이 문화제 등을 통해 여론을 확산하면서 여러 차례 오쿠라재단과 반환 협상을 진행했으나 아직 환수 결정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2011년 3월1일 동일본대지진 때 탑 기단부와 3층·4층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고, 4층·5층이 오른쪽으로 25㎝ 뒤틀린 것이 확인됐다. 당시 반환 여론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돌려받지 못했고 오쿠라 재단이 그해 12월 탑을 복구했다.

이천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최고의 불교미술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단아한 미를 갖추고 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귀한 문화재이다. 남의 나라의 존귀한 문화재를 일개 호텔 정원에 장식하며 한국의 환수요청에 미온적으로 응하는 오쿠라 재단은 지금이라도 강제약탈에 대한 반성과 함께 환수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한다.


이천 오층석탑 공모반출과정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장 장식품으로 옮겨감
- 이천 오층석탑(이천 향교방 오층석탑)은 안흥사지 오층석탑과 함께 반출
- 일본이 한일병합 5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의 정치업적을 자랑하고 총독부의 권위를 과시하며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훼손하고 가치를 떨어트리기 위한 목적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경복궁에 마련한 일종의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장을 꾸미기 위해 반출
◆1915년~1916년- 이마니시류의 유물 유적 조사 활동(9월 2일~13일 광주, 이 천, 여주)
◆1918년 7월- 오쿠라 슈코칸 이사 사카다니, 당시 하세가와 조선총독에게 평양역전에 있던 석탑 요청
- 슈코칸 부지 내에 경복궁의 자선당을 옮겨놓고 보니 조선의 석탑이 곁에 있으면 좋겠기에 석탑 1기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
◆석탑 양도허가를 둘러싼 총독부내의 논의가 이루어짐
- 오쿠라가 요청한 평양 칠층석탑은 백성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있어 이목이 문제됨으로 대신에 이천오층석탑을 선정함. 
- 이는 오쿠라측 요청에 부합할 것이니 다시 신청하게 하여 건네주고자 함.
- 이에 대한 고적조사위원회 측의 소견을 듣고자 함. 
- 고적조사위원회로부터 이견이 없다고 회답함.
◆1918년 10월 8일- 총독부에서 오쿠라 측에 답신
- 평양의 정차장 앞 탑은 불가하지만 이천 오층석탑은 양도할 수 있으므로 오쿠라 측에서 재 신청 하기를 요망함.
◆1918년 10월- 석탑 양도를 요망하는 정식 요청서를 조선총독 앞으 로 제출
◆1918년 10월 - 조선총독부에 의한 하부허가 및 반출 허가 통보
- 인천항에서 배에 실려 현해탄을 건넘
- 인천세관으로 보낸 협조공문에서는 석탑양도 사유를 ‘조선의 고미술을 연구시키는데 적당하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라고 함.
- 일본 동경 오쿠라 호텔 옆 슈코칸 경내로 옮겨짐
◆일제시대인 1918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는 오쿠라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고 기록

오쿠라 컬렉션의 오쿠라 기하치로는 누구

일본의 군납 거상으로 을사늑약 이전부터 조선에 들어와 대규모 토목, 건축사업을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긴 것은 물론 문화재 수탈까지 자행, 1917년 오쿠라 슈코칸이라는 일본 최초의 사설 박물관을 설립함(개관당시 미술품이 3,692점, 서적15,600여권 소장)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