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새해 예산안 강행처리 후폭풍으로 연말 정국이 ‘시계 제로’의 상황으로 치닫자 정가는 또다시 박근혜 전 대표의 ‘입’에 주목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어떤 언급을 내놓느냐에 따라 정국의 방향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올 초 여권 내 최대 쟁점이었던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지난 6월 국회 본회의 표결로 부결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예산 파동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다. 청와대의 사찰 의혹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결국 갑갑한 민주당이 박 전 대표를 한 번 찔러봤다. 박 전 대표가 ‘복지’를 화두로 내걸고 대권 행보에 나선 만큼 새해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된 데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나선 것. 이에 친박계는 발끈했지만 박 전 대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속된 박 전 대표의 침묵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예산안 파동의 침묵 또한 ‘박근혜 정치’의 일환 “입장 발표 없다”

복지 화두로 대권 행보 본격 시동, 국가경영에 대한 공부 매진 중


박근혜 전 대표의 ‘침묵정치’에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도 말이 많다. 친이계는 박 전 대표가 예산안이 강행 처리된 지난 8일 본회의에 불참한 것과 이후 말을 아끼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본회의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야당이 막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당이 위기에 처한 만큼 수수방관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정가 일각에서 박 전 대표가 본회의에 불참한 것을 두고 당의 예산안 강행 처리를 반대하는 무언의 제스처라고 분석한 만큼 친이계에선 야당과 마찬가지로 박 전 대표의 입장 표명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친박계에선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둘러싼 갖은 분석에 대해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예산안이 강행 처리된 8일에도 박 전 대표는 국회 본청까지 들어왔지만 여야의 격렬한 대치로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 안전상의 문제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친박계의 설명이다.


안전상의 문제로 본회의 불참


하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박 전 대표는 심한 몸싸움이 벌어진 지난해 예산안 강행 처리 때도 본회의에 참석해 표결만큼은 꼭 해왔던 탓이다. 정가에서 박 전 대표의 본회의 불참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가 당 지도부의 무리한 강행 처리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실제 박 전 대표의 경제통으로 알려진 이한구 의원도 이번 예산안 처리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여당 내 대표적인 4대강 사업 반대파로 불린다. 지식기반 경제 등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하기 위해 4대강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따라 당 일각에선 이 의원의 논리가 박 전 대표의 복지론과 맞물리면서 박 전 대표 불참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더욱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파병 동의안 표결 과정에선 일부 친박계 의원들이 기권하거나 반대표까지 던졌다. 이성헌 의원이 당내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고, 유승민ㆍ이혜훈 의원도 기권표를 던졌다. 파병에 대한 충분한 토론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리하게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실 4대강에 대해서도 친박계 상당수 의원들이 사업의 속도나 규모를 조정할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이한구 의원의 경우 최근까지도 보의 건설과 준설 등에 대해서는 예산을 조정해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혀 왔다. 서병수 최고위원도 지난 7월 전당대회에서 4대강 사업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번 예산안이 강행 처리된 다음날 열린 최고위원회의에도 서 최고위원은 불참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박 전 대표가 평소 4대강에 대해서 명확하게 입장을 밝힌 적은 없었다. 다만, 이 대통령의 속도전 방식에는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석에서 유럽의 특정 나라를 거론하며 강을 정비하는 게 100년 이상 걸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환경이나 생태변화 등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때문에 정가 안팎에선 박 전 대표가 예산안 처리과정에서 4대강에 대해 침묵하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소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은 “이로써 침묵은 동조라는 격언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박 전 대표의 ‘침묵’에 일침을 가했다.

결국 민주당은 ‘박근혜 때리기’에 나섰다. 박 전 대표를 여당 내 야당으로 대하며 청와대의 ‘박근혜 사찰설’을 제기했던 그간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이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유리한 얘기일 경우 고개를 쳐들고 말씀을 한다”면서 “국민의 70%와 4대 종단, 모든 학자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할 때 박 전 대표는 무슨 말씀을 하셨나”라고 꼬집었다.

나아가 박 원내대표는 “‘박근혜표 복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번 예산안 날치기에서 복지예산이 어떻게 됐는지를 함께 밝혀야 한다”면서 “박 전 대표는 날치기로 그 많은 복지예산이 완전히 삭감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박근혜표 복지’는 예산이 필요 없는 복지가 아닌가”며 되물었다.


MB 회동 이후 운신의 폭 축소


박 전 대표는 오는 20일 자신이 대표 발의한 사회보장기본법 전면 개정안 공청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동안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해왔던 만큼 박 전 대표는 이번 공청회를 초석으로 삼아 대권을 향한 본격적인 시동을 걸 것이라는 게 정가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이에 따라 내년 초부터는 박 전 대표가 그간 자제했던 언론 인터뷰는 물론 각종 세미나 참석과 함께 강연, 지역 방문 등 광폭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이르면 내년 초가 돼야 대선 행보의 기지개를 켤 것이라는 정가의 예상을 뛰어넘는 발 빠른 행보다.

때문에 정가에선 박 전 대표에 대한 민주당의 공세가 견제로 읽히고 있다. 진보진영의 주요 담론인 ‘복지’에 대한 화두를 박 전 대표에게 빼앗긴 민주당의 분풀이인 셈. 예산안 강행처리에 대한 입장 요구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친박계는 발끈했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제1야당으로서 자존심도 없나. 자기들의 정책과 방향을 알려야지 왜 박 전 대표의 입만 쳐다보나”고 말했다. 친박계의 다른 의원은 침묵 역시 ‘박근혜 정치’의 일환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대권 행보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 것은 비단 민주당뿐만이 아니었다. 친이계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계획 중인 사회보장기본법은 사실상 이 대통령의 복지정책이 잘못됐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간 “현직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뜻을 밝히며 계파 갈등을 피해왔던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돌아보면 상당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실제로도 박 전 대표는 지난 8월21일 이 대통령과 단독 회동을 가진 이후 화해모드를 견지하면서 여권 비판을 삼가왔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재창출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합의한 이후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이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대신 자기 정책 알리기에 힘썼다.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밑에서 일했던 이창화 전 청와대 행정관이 박 전 대표를 사찰했다는 의혹에 대해 “그런 얘기는 많이 있었잖아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사찰 의혹에 대해 대응을 하게 되면 대권 준비에 부담으로 작용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의혹으로 번질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 집권 전반기에는 각을 세우는 말을 함으로써 몸값을 올리고 집권 후반기에는 침묵함으로써 몸값을 유지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결국 대권을 향한 정밀한 수라는 것. 친박계 의원들도 사찰 의혹 논란에 대해 발언을 자제했다. 사찰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나온 루머에 불과할 뿐 사찰 의혹을 제기한 민주당에서 결정적인 새로운 사실을 내놓지 않는다면 더 이상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입’ 열 경우 여권 내 갈등 증폭


하지만 이번 예산안 강행 처리를 둘러싸고 당 내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이 제기되자 친박계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다수의 친박계 의원들은 “예산안은 자기들이 무리하게 처리해놓고 왜 이제 와서 박 전 대표를 물고 늘어지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박 전 대표도 예산안 강행처리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입장을 밝혔을 경우 여권 내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침묵모드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내놨다.

한편, 박 전 대표는 예산국회가 조기에 마무리됨에 따라 국가경영에 대한 공부에 매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다룬 화제의 SBS드라마 ‘대물’에서 “대한민국은 국민을 버리지 않는다”는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박 전 대표가 그 대사에 딱 맞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를 위해 정책 전문가들과 심도 있는 내부 정책토론회를 가졌다는 게 박 전 대표 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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