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위원들이 잇따라 자진사퇴하면서 인권위의 업무가 사실상 마비된 상황이다. 상임위 차원의 의견표명이나 권고업무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더 큰 문제는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사퇴공방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위 내부는 물론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현 위원장에 대한 우려와 비난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논란의 당사자인 현 위원장은 요지부동이다. 사퇴를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며 강경대응에 나서 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자진사퇴로 공석이 된 상임위원의 후임으로 친정부 인사를 임명해 인권위 안팎으로 위기의식이 가득하다. 뇌사상태에 빠진 인권위의 쟁점을 살펴봤다.


인권위원 줄사퇴, 전국 시민단체 팻말 내걸고 정부 규탄 한목소리

인권경력 전무 인사 선임한 “인사권자 근본책임” 청와대까지 불똥


국가인권위원회의 내홍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0월부터다. 사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취임 이후부터 잡음이 많긴 했지만 지난달 25일 상정된 운영규칙 개정안이 결정적 화근이 됐다. 인권위는 개인이 아닌 합의체 운영체제이나 현 위원장이 운영규칙 개정안을 통해 상임위 결의 없이 위원장 단독으로 전원위원회에 상정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 이 같은 결정으로 유남영ㆍ문경란 상임위원은 동반사퇴를 강행했다. 물론 현 위원장은 이에 대해 “임기가 만료되는 두 상임위원이 물러나면 한나라당 출신 위원들이 오게 되는데 독단적으로 결정하려면 규정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며 항간에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을 일축했다.


“쓴소리 못하는 형식적 기구”


하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인권위는 위원장과 3명의 상임위원, 7명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중 진보인사와 보수인사가 각각 5명씩이다. 현 위원장을 포함하면 진보와 보수의 비율은 6대 5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현 위원장이 규정까지 바꾼 것은 이미 독단을 넘어섰다는 게 인권위 안팎의 설명이다.

게다가 현 위원장의 말처럼 현정부의 입맛에 맞는 상임위원이 선정될 경우 인권위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본래 인권위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이나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이 설립취지다. 국가권력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는 만큼 현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현 위원장의 취임 이후부턴 정권을 불편하게 하는 사안에 대해선 전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논란이다. 그나마 사퇴한 2명의 상임위원이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는 게 인권위 안팎의 설명이다. 따라서 이 2명의 후임을 선정을 두고 인권위 안팎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10일 청와대가 유 상임위원 후임으로 인권경력이 전무한 고대 출신의 친정부 성향인 ‘시민을 위한 변호사 모임’ 공동대표 김영혜 변호사를 내정한 것. 청와대에선 김 변호사를 내정한 이유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보수적 성향의 변호사모임 대표를 인권위원에 내정한 것은 현 위원장 체제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에 인권위 안팎에선 인권위원 선정과정이 불투명하고 인권활동 경력이 전혀 없는 인사들을 임명해 권력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고 성토한다. 김칠준 전 사무총장을 비롯한 18명의 국·과장급 전직 인권위 직원들도 현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동시에 “인권위원의 자격을 ‘인권 문제에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 보장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한 인권위법을 위반한 정부의 불법적 인사에 사태의 근본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도 현 위원장의 인권 의식은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깜둥이’,‘독재’ 발언이 대표적 사례다. 물론 현 위원장은 이에 대해 “인권 침해의 사례로 들었던 것”, “결론이 안나 회의를 미루려는데 어느 한 사람이 ‘독재를 하겠다는 거냐’고 반발한 데 대해 ‘독재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으로 해명하며 고비를 넘겼지만, 이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낮은 인권 의식으로 직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3명의 상임위원 중 2명의 상임위원이 동반사퇴한 뒤 홀로 인권위에 남은 장향숙 상임위원 역시 현 위원장의 직무 평가를 냉정하게 내다봤다. 현 위원장은 “인권을 바라보는 견해가 다르다”고 반박했으나 현재 우리나라 인권위의 위치를 보면 현 위원장의 해명은 변명에 불과하다.


“나는 떳떳, 사퇴할 생각 없다”


당초 우리나라는 국가인권기구의 세계조직인 국제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로부터 A등급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 위원장 취임 이후 아시아인권위원회는 ICC에 “한국 국가인권위원회 등급을 낮춰달라”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모범적인 인권위 운영으로 높이 평가받으면서 2007년 부의장이 됐고, 2010년부터는 3년간의 의장국을 사실상 예약한 상태였으나 현 위원장이 의장 출마를 스스로 포기했다. 여기에 지난해부턴 인권위의 인원이 크게 감축되면서 민원처리나 임권침해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3월 인권위의 정원 208명에서 164명으로 21%나 감축시켰다.

급기야 인권위의 파행 논란은 국회 국정감사로까지 번졌다. 지난 9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인권위에 대한 국감장에서 여야는 현 위원장의 사퇴 여부를 놓고 여야 의원들 간 공방전으로 치달았다. 야권에선 한나라당이 추천했던 문 상임위원마저 사퇴할 만큼 현 위원장의 독선이 지나치다고 지적했고, 종국에는 친일파 후손 논란으로까지 사태가 악화됐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입장은 달랐다. 운영규칙 개정안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현 위원장을 옹호하고, 최근 인권위 파행 사태를 일부 세력의 ‘현병철 흔들기’로 규정했다. 특히 사퇴한 상임위원 2명은 이명박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퇴한 것으로 해석했다. 임기가 2~3개월밖에 남지 않은 위원들의 퇴진은 결국 쇼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실제 문 상임위원은 한나라당에서 추천한 인사지만 유 상임위원의 경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의 변호사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해 두 사람 모두 3년간의 임기를 거의 채워 적게는 2개월 많게는 4개월가량 임기가 남아있던 상태였다.

나아가 한나라당은 인권위 파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구조적 문제와 정치 성향의 편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상임위원회 권한이 전원위원회 권한보다 큰 것이 잘못이라는 것. 인권위가 상임위 명령에 의해 좌지우지 돼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상임위원 2명이 상임위 권한 축소에 반발하며 사퇴한 것 또한 겉으로 보면 조직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정파적 이익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 위원장 역시 야권의 사퇴 요구에 “인권위는 공정성과 중립성에 따라 가장 잘 운영되고 있다”면서 “사퇴할 생각이 없다”고 반박했다.


현 위원장의 거취에 여론 주목


하지만 현 위원장의 사퇴 공방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인권위원의 줄사퇴가 예고돼 있는 것. 이미 비상임위원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10일 사퇴했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장주영 비상임위원도 사퇴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124명의 법학자와 210명의 변호사가 함께한 ‘현병철 위원장 사퇴 촉구 법학자 및 변호사 공동 상소 준비단’과 전국 621개 단체가 결성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전국단체’가 잇따라 항의에 나서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인권위의 중요 포럼으로 꼽히는 심포지엄 발제자들 또한 보이콧으로 전면전을 택했다. 대혼란에 빠진 인권위 내부에서도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낯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면서 “파행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현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현 위원장의 거취에 한층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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