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인간 소모품

<전편 이어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청운은 생각에 잠겼다. 까마득한 시간을 이겨내 보기 위해서였다. 평소엔 하지 않던 개똥철학도 상황에 따라서는 저도 모르게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나 인간들의 고상한 정신적인 면에 대해 사색을 해보려 하자 모래 속에 묻힌 몸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듯했다. 그래서 별수없이 저속한 면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가능하면 남을 속여 이익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행운까지도 거덜내는 족속.’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육욕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동물.’ ‘같은 종족끼리 패를 갈라 싸우는, 개미보다 훨씬 잔인하게 동족을 살해하면서 낄낄 웃어대는 광인들…….’

하지만 그런 개똥철학이나마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파도 또한 더 거세어져 밀려왔다. 점점 다가온 파도의 포말은 턱을 넘어 입술에 차가운 키스를 하며 간질렀다. 부드럽고도 강인한 바닷물은 곧 이어 철썩거리며 밀려와 코를 들이쳤다.

소리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기에 청운은 입을 꼭 다문 채 숨을 멈추곤 가만히 있었다. 그는 하늘이나 신이나 부처님에게도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돌덩이처럼 안간힘으로 버텨낼 뿐이었다.

죽음같은 시간을 견디며

자정이 지날 무렵엔 물결이 아예 머리를 넘어 뒤쪽으로 서너 걸음쯤 더 가서야 멈췄다가 되돌아갔다. 그러나 더 거센 기세로 밀려왔다가 내려가길 되풀이했다. 청운은 그때마다 눈과 입을 꽉 닫곤 땅속 어딘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가련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며 죽음 같은 시간을 참아냈다.

‘하늘은 사람을 지푸라기 인형처럼 본다고 하더라. 인간만 특별히 사랑해 주는 귀한 자식이 아니라…… 곰, 늑대, 토끼, 쥐, 파리, 바퀴벌레, 참나무, 엉겅퀴, 민들레꽃 들을 다 똑같이 본다. 우선 내가 내 자신을 이겨내고 잡초보다는 꽃처럼, 모기보다는 꿀벌처럼 살아야 하늘과 땅도 도와주는 게 아닐까?’

차츰 물결선이 낮아지는 성싶었다. 청운은 지친 얼굴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았다. “엄마……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너무 보고 싶네요. 엄마, 저 좀 살려 주세요! 아니, 아녜요. 제가 힘껏 견뎌낼게요. 엄마를 만나면…… 옛날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거든요. 검정고시 책에서 이런 말을 보고 속으로 외워 두었는데…… 한번 되새겨 볼게요. 엄마, 들리세요?”

청운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려움이나 불쾌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며, 역경에 처했더라도 희망과 기쁨이 전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이를테면 바느질이나 수예를 할 때, 어둡고 무거운 바탕에 경쾌한 무늬를 수놓는 것이 밝은 바탕에 침울한 무늬를 넣는 것보다 한결 더 아름답고 곱게 느껴진다…이러한 눈의 즐거움에 미루어 마음과 영혼의 기쁨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향香이나 양념은 불에 피우거나 곱게 빻을 때 더욱 향기롭다. 그러므로 행복에 탐닉한 사람보다는 역경에 부대껴 이겨내고 성숙해진 사람이 한결 고상한 인간미를 풍기는 것이다.’

그러고는 고개가 푹 꺾이더니 모래밭에 코를 묻었다. 아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직 한 번씩 파도가 밀려와 얼굴을 덮쳤으나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령 죽는다 한들 그 누가 슬퍼해 주겠는가.

새벽녘이 지나 아침빛이 비쳐 올 즈음에야 청운은 겨우 깨어났다. 누군가 뺨을 세차게 치며 욕을 하고 있었다.

“개새끼! 이게 아직 뒈지지 않았네? 빠삐용이 된 꿈이라도 꾸었냐, 응? 원래는 사흘간 묻어 놓지만 바닷물 먹은 값으로 사면한다. 야, 꺼내 줘라!”

조교가 명령을 내렸다. 청운은 명줄은 붙어 있었지만 반쯤 죽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구덩이에서 끌어내 모래사장에 팽개쳐 두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청운은 뙤약볕 아래서 말라 가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메마른 신음을 뱉어냈다.

정오를 지나 점심식사를 할 무렵에 누군가 급히 시신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청운의 상반신을 일으키곤 수통 속의 물을 입에 바짝 대 부었다.

청운의 눈이 스르르 뜨였다. “스라소니 형….” “그래, 어서 정신 좀 차려.” “형, 고마워….” “아냐, 내가 더 미안해. 간밤에 살짝 와 보려 했는데 조교한테 걸리는 바람에…좀 더 마셔. 야, 그리고 여기 건빵 봉지 묻어둘 테니 좀 있다가 살짝 빼 먹어.”

스라소니는 올 때보다 더 빨리 달려가 버렸다. 청운의 눈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떨다가 백사장으로 떨어졌다.

원대 복귀 후에도 훈련은 계속되었다. 더 심해지는 기색마저 보였다. 하지만 늘 받아 온 터라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건 없었다.

오히려 초가을로 접어들어 푸르던 잎새들이 누렇게 변해 소리 없이 산골짜기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대원들은 자기 자신이 낙엽이라도 된 듯 암울한 표정이었다. 특히 청운은 해변에 파묻힌 채 밤새도록 죽음 가까이 갔었던 기억이 언뜻 상흔으로 변해 광증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

‘세상도 내 인생도 다 무의미하게 보여. 아니, 무서워…왜 이렇게, 이런 꼴로 살아야 할까? 차라리 그 전에 절벽으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청운은 가장 앞서서 거칠게 가슴팍을 바위에 비벼대며 가파른 산정을 향해 기어올랐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계곡은 지옥의 밑바닥이 아닐까? 그리고 저 기암괴석들은 세상의 잘난 사람들 같더니만, 막상 올라오고 보니 짐승처럼 보이기도 하는군. 그리고…아! 저기 저 천길 낭떠러지를 몇 번이나 구비돌며 떨어져 내리는 폭포는 마치 전설 속의 백룡이 날아 승천하는 것 같구나!…….’

지난번에 교관이 직접 공약했던 회식이나 외박 건에 대해서는 꿩 구워 먹은 듯 일언반구도 없었다. 심란해진 대원들이 참고 있던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무슨 허무주의자들처럼 단체로 땡깡을 부리자 교관이 다시 선글라스를 낀 채 나오더니 입귀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흐음, 언젠가 정신교육 시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흠, 여러분은 우리의 막강한 50만 대군을 대신해서 앞으로 멸공통일의 최전선에서 활약할 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명 한명의 정신과 육신 속에 정규 국군의 정신을 압축해서 넣어 한 단계 정제한 초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여 정신 승리를 하는 순간 육체도 환골탈태하여 일당천의 전사로 우화등선하는 신비로운 기적이 일어나게 됨을 명심하라! 굼벵이가 온갖 고충을 견뎌내다가 나비가 되려는 마지막 한 순간 방심하여 이도저도 아닌 처참한 반거충이 상태로 퍼덕거리는 꼴을 상상해 보라! 여러분은 모두 그런 비극을 넘고 우화등선하여 민족 통일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불그레한 혀를 꺼내 입술을 슬쩍 핥았다. “하하, 나도 인간이므로 여러분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동안 고생도 많았다. 자연스런 청춘의 본능이나 욕망을 억눌러야 했던 고충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꼴리는 대로 쏟아 버리는 건 짐승이나 곤충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짓이다. 여러분은 특수 신분이며 초인적인 존재를 지향해야만 한다! 그런 욕망, 즉 에너지를 고급스런 이상으로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오, 혈기방장한 청춘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다. 전번에 내가 언약했던 회식이 좀 미뤄진 것도…… 흐험…… 어디까지나 여러분을 민족의 영운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배려였던 셈이었던 것이다. 그래, 힘을 모아 조금만 더 가자! 마침 내일부터 최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훈련이 실시된다.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해 살아남는 자에게만 천국의 축복이 내릴 터이니 기대하라!”

교관은 말을 마치자 서산 너머로 잠겨 가는 붉은 태양을 쳐다보며 다시금 입귀로 미소 지었다. 대원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별 도리 없이 또 한번 믿어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 강렬하던 빛을 거두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 주며 내려가는 저 해님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선글라스를 쓴 인간 눈엔 어떻게 보일까?’

청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굴 속의 비밀

다음날이 고요히 밝아 왔다. 오전엔 ‘극한생존법’이란 소책자를 교재로 삼아 특강이 있었다. 어떤 열악한 조건이라도 극복하고 살아남는 법.

하지만 교본 자체가 미국 특수부대의 교범을 토대로 짜깁기한 것이라 그런지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기엔 어렵고 허무맹랑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유명한 북한 연구가 겸 군사 전문가이며 퇴역 장군이라 소개된 초청 강사는 자신의 지론을 밀고 나갔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연구한 프로젝트 중에 하나이니 잘 듣기 바란다. 흠, 여러분들이 만약 네바다 사막에서 표류하다가 붉은 개미떼의 습격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힘들 거야. 물도 진흙도 없는 사막에서…… 전갈더러 불개미를 물어 죽여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독수리에게 청산으로 옮겨 달라고 애걸했다간 바위 둥지로 끌려가 찢겨 먹힐 테고, 곰님께 혀로 좀 핥아 달라고 청원하려니 허연 이빨이 무섭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야…… 뭐라구? 도망치는 게 좋다구? 흠, 불개미는 보통 개미가 아니야. 마치 북한 놈들처럼 악착같을 뿐더러, 자기 조상마저 부정하고 불사조인 척 허세를 떨며 강경하게 나온다니까. 그러니 좀 귀찮고 괴롭더라도 단전호흡이나마 하며 지그시 견뎌내는 게 최선이란 말야. 이열치열, 이냉치냉이라고나 할까. 시체처럼 죽은 듯 가만히 있으면 불개미 같은 놈들도 물러나는 걸 내가 분명히 봤어. 그러니까 속으로는 비웃으며 그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외우는 게 현실적이란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거지. 허허헛…….”

깊은 산중에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그 당시는 혁명시대였다. 가난을 물리치고 부강한 국가로! 고루한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현대사회로!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권력층은 그런 구호를 외치며 국민들을 일하는 로봇으로 만들어 갔다. 특혜 받은 재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미국이나 일본 같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민들은 병정개미나 일개미처럼 동원되었다. 부귀한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진실의 원칙과 안전수칙은 거의 무시되었다. 수시로 어처구니없는 사건 사고가 터져 수많은 국민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낡아빠진 배에 과도한 화물과 인원을 실었다가 좌초한 사건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제주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그 ‘삼월호’엔 수학여행을 가던 3백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타고 있었는데, 청와대를 비롯한 주요 언론에서는 ‘전원 구출’이란 뉴스를 내보냈으나 그때 이미 지옥경에서 발버둥치다가 모두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차가운 물결만 죽은 아이들과 산 부모들의 설움을 실은 채 출렁거렸다.

그 외에도 겉보기엔 멀쩡하던 아파트가 무너져 수백 명이 사망하기도 했었고, 또 언젠가는 조파리라는 희대의 다단계 사기꾼이 나타나 ‘뉴코리아 프로젝트’라는 걸 가지고 힘없는 지푸라기 같은 사람들을 희롱했다. 그로 인해 평생 아껴 모은 목돈을 잃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대체 어찌 해야 할까?’ 청운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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