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어보면 그들 모두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자주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라고...

6섯살 막내 손녀와 여덟 살 손자가 보낸 며칠 전 내 생일 축하 카드에 “할아버지 사랑해요. 자주 놀아주니까요. 특히 장기 탱기기가 제일 재미있어요.”라고 쓰고 다른 쪽에는 말과 졸을 진열해 놓은 장기판을 그려 보냈다.

브룩스 아담스는 (Brooks Adams)는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링컨 대통령 당시 영국 대사를 지낸 찰스 아담스(Carles Adams)의 아들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와 같이 얼굴을 마주할 시간을 별로 갖을 수 없었던 브룩스는 소외감에 우울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어느 주말 아버지와 같이 낚시를 갔는데 고기는 낚이지 않고 갑작스런 폭우로 차 속에서 두 시간여를 기다리다 엄마가 싸준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아버지와 나누어 먹고는 두 시간여를 빗속을 더듬어 집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아버지 찰스 아담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아들과의 낚시는 참으로 지루했고 시간만 낭비했다.”고...

그런데 다음날 청소를 위해 아들 방에 들어간 엄마는 책상 위에 펼쳐저 있는 아들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아버지와의 낚시 여행은 참으로 값지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버지 사랑해요!”

브룩스는 역사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변호사로, 사회 평론가로, 저술가로서도 명성이 있다.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그날의 사건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에게는 가장 지루하고 시간만 허송한 짜증스러운 날이 아들 브룩스에게는 생의 행로를 바꾼 참으로 값있고 행복한 날이었다.

인간의 심적 내부를 삶의 에너지(Eros : 건설적이고 창조적이며 도덕적이고 사랑 등 삶을 강화하는 내용)와 죽음의 에너지(Thanatos :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비도덕적인 증오 등)로 대별하고 인격에너지의 배분 원칙을 주장한 사람은 19세기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프로이드(Sigmund Freud)다. 그는 마치 과학자 제임스 쥴(James Joule)이나 헬름홀츠(Herman Helmholtz)의 부존법칙(Law of Conservation of energy)처럼 세 등분된 이드(id : 본능적 욕구) 이고(ego : 자아중심적 욕구) 초자아(Super ego : 理想我적 초월적 욕구)에 배분된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이론이다.

즉 본능적 에너지의 약화는 그 에너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초자아 에너지의 증대를 말하며 초자아 에너지 약화는 곧 본능적 욕구가 커져 쾌락 원칙에 따른 자기중심적 충동에 압도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격 내부의 에너지 총량은 항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숙제는 어떻게하면 죽음의 에너지를 중화(승화)시켜 삶의 에너지를 증대 강화시킬 수 있는가다. 그 방법은 일, 운동, 신앙, 요가나 선(禪)등이다. 그러나 그중 하나가 놀이(play)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관람용 스포츠도 포함되는데 옛날 로마시대에 성행한 콜라세움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혈투나 맹수들과의 사투에서 흘리는 피를 보면서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등 또 독재자들은 민심 콘트롤의 한 방편으로 스펙데이터 스포츠를 장려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도 군정시절 붐을 타던 프로야구 경기같은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우리 정서에 붙어있는 맛없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는 놀이가 참 좋은 것이고 보았다. 같이 어울리는 운동이나 오락(recreation)을 통해 동질 의식과 사랑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초자아 에너지의 약화는 곧 본능적 욕구의 증대로 그것은 본능적 충동에 매이는 병이다. 개개인의 성격병의 확대가 곧 전쟁이라고 한 칼 메닝거(Karl Menninger)의 지적은 옳다. 이런 의미에서 잘 노는 자는 원만하고 놀지않는 사람은 위험하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는 일은 전쟁방지의 도덕적 대용물(Work is a moral –equibalance for war)라고 했는데 심리학상으로 보자면 for war(놀이)는 전쟁방지의 도덕적 대용물(play is a moral equibalance)라고 말을 바꾸어도 옳은 말이다.

옛날 버마의 랄라잉 왕비는 전쟁광인 남편에 장기를 고안해 같이 장기를 뒤고 놀게해서 전쟁 욕구를 제어했고 미국에서는 전국에 TV 방영되는 수퍼볼(Super Bowl)시합 날에는 범죄 발생율이 7~80%로 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종교에서는 사랑의 에너지 증대를 위해 놀이를 경시하는 경향에 교리나 율법과 고행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격 에너지의 불균형에 되려 욕구불만을 증대시켜 바리새주의와 개종 권유 타종교 무시로 분란이 자주 일고 있다. 같이 어울리는 놀이와 사랑을 통해서도 고상한 품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신앙인들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실상은 본능적 충동의 억제로 사랑을 증대시켜 삶을 강화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성숙함이요. 깨우치고 중생이라는 면에서 놀이는 밥 먹고 일하고 또 신앙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하면 혹 쓴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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