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TSMC의 일본 규슈 구마모토 공장 준공식(2월 24일)은 일본 반도체가 기사회생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준공식에 참석한 모리스 창(張忠謀) TSMC 창업자는 1968년 일본 소니 그룹 공동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와 미국 반도체 선구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의 합작회사 설립 비화를 소개하면서 당시 일본 정부와 산업계의 폐쇄적 입장 때문에 상당히 고전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TI간부로 근무했던 모리스 창에 따르면 세계적인 TI의 일본진출을 정부와 업계가 한결같이 반대하자 미국과의 외교 마찰을 경계한 모리타의 소니가 소규모 합작회사 설립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 그로부터 45년이 지나서야 세계적 규모의 외국(대만) 반도체 공장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유감이 담긴 회고담이다.

일본 산업계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일본 주식회사’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 특히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재건에 피치를 올린 것과 때를 같이 한다. 2차대전 패전으로 일본 재벌이 해체되자 각 기업은 ‘경영권의 안정화’를 위해 오너를 대신할 새로운, 안정적 대주주가 필요하게 되었고 금융계(시중은행, 지방은행, 보험사 등)가 나섰다. 각 사업회사와 공동으로 평균 66%의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경영안정을 뒷받침했다.
잃어버린 30년 동안 은행의 PBR(주가순자산 비율)은 1 이하로, 또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역시 상장 투자신탁 (ETF) 매입을 통해 일부 기업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로 인해 수익이 낮은 기업을 포함한 자본시장의 선별기능이 훼손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다시 말하면 상호출자와 비슷한 경영 협조를 목적으로 한 ‘안정주주’제도는 주주환원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단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 전산업계를 하나의 주식회사로 묶는, 일테면 카르텔 효과의 극대화를 통해 ‘경제 강국 일본’을, 미국과 유럽 이외 지역의 유일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말,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기 전자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합작회사 설립 제의가 줄을 이었다. 특히 미국 GE가 마츠시다 전기(파나소닉)를 방문, 두 회사가 합작으로 새로운 형태의 TV 공장 설립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또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퇴임한 이후 자금난을 겪던 애플이 소니에 매각을 타진했으나 이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 전자 전기업계는 PC와 3G 휴대전화를 연계한 이른바 ‘i 모드’에 집착한 나머지 고차원의 소프트웨어 중요성을 놓친 셈이다. ‘하드웨어’ 중심의 제조업 강국을 고집하다가 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반도체 몰락과 함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된 것이다.

그 30년 동안 창업한 기업은 ‘일본 주식회사’ 소속이 아니었다. 특히 해외자금은 일본 주식회사가 아닌 신규 기업에 대한 투자에 집중했다. 기존 대기업의 실패를 보면서 자란 젊은 경영층은 주주환원 경영, 신기술 중심체제로 급속한 성장을 이어왔다. 영국 에든버러의 유력투자가 그룹에 따르면 1985년부터 운영해 온 투자신탁 ‘신 니폰’의 기준가격은 89년 말을 기준, 약 5배로 불어났다. 닛케이 지수 사상 최고기록을 계기로 지난 34년간 주가가 10배 이상 오른 기업 1백 42개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최고기록은 2백 36배나 오른 덮밥 체인인 ‘젠쇼 홀딩스’가 차지했다. 일본 주식회사가 ‘잃어버린 30년’을 헤매는 동안 전후 세대 중심의 신흥기업은 구미식 경영으로 급성장, 일본 경제를 지탱해온 것이다.

이번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 준공은 메이지유신 이후 지금까지 대를 이어 온 일본 전통적 기업도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한 결과다. 동시에 일본 주식회사라는 카르텔에서 벗어난 일본 산업계도 독립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TSMC 공장 하나로 일본이 반도체 부문의 패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버리고 체질 개선을 택한 일본의 경쟁력이 현재보다 훨씬 높아질 길을 연 것은 분명하다. 국내외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우리 경제계가 다시 한번 분발해야 하는 시점을 맞은 것이다. 정책당국부터 기업을 옥죄는 각종 규제의 대담한 철폐에 나설 필요가 있다.

<Who is>
이원두 칼럼니스트. 언론인. 번역가 한국일보 부장, 경향신문 문화부장 부국장 내외(현 헤랄드)경제 수석논설위원, 파이낸셜 뉴스 주필 한국추리작가협회 상임 부회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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