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2번째로 선정된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충남 공주 공산성 모습. 사진=김현철 기자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충남 공주 공산성 모습. 사진=김현철 기자

민주신문=김현철 기자|가까운 과거, 근현대사에 싫증이 생겼다면 고대역사를 접해보는 건 어떨까. 

'백제고도 벨트'로 이어지는 공주, 부여, 익산은 백제역사 탐방에 제격인 곳이다. 특히 이들 세 도시에 분포하는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우리나라 12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충남 공주시 △공산성 △송산리 무령왕릉과 왕릉원, 충남 부여군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나성, 전북 익산시 △왕궁리유적 △미륵사지 이들 8곳을 통틀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불린다. 

왕이 살던 이곳은 백제문화의 최절정기인 백제 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들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우리나라 고대왕국 중 하나였다. 

◇웅진, 금강 터에 백제 재건하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문주왕 원년(475)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다. 공산성은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시)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도성 안에 있었던 왕의 성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를 거치며 석성으로 개축됐다. 

공산성은 문주왕 이후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16년(538) 재임까지 사비(현 부여군)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공산성 내 너른 터와 금강 위에 쌓인 산성 모습. 사진=김현철 기자
공산성 내 너른 터와 금강 위에 쌓인 산성 모습. 사진=김현철 기자

공산성은 백제 왕실의 생활문화를 살필 수 있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는 등 명실상부한 왕성으로 역사성을 갖춘 곳이다.

관광해설사가 일본인이었는데 한국 역사를 설명하는 해설자가 외국인인 것이 신기해 물으니 선조 뿌리를 찾으러 오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웅진그룹의 창립자인 윤석금 회장은 영업사업으로 시작해 30대 그룹 총수까지 올랐던 신화적인 인물로 그가 고향인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명을 웅진으로 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 금강을 낀 공주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갈하고 고즈넉한 느낌의 공주시내를 바라보며 백제의 숨결을 느껴 봄직하다.

충남 부여 백마강 위에 솟은 절벽이 나당연합군 침공에 몸을 내던진 삼천궁녀의 전설이 남아 있는 낙화암이다. 사진=김현철 기자
충남 부여 백마강 위에 솟은 절벽이 나당연합군 침공에 몸을 내던진 삼천궁녀의 전설이 남아 있는 낙화암이다. 사진=김현철 기자

◇사비, 백제 마지막 의자왕과 삼천궁녀

웅진은 지역이 협소해 고구려 침입에 왕도로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이에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 이후 사비는 123년간 백제의 왕도가 된다. 

특히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기 백제의 대표적인 왕궁 유적이다. 관북리유적에는 왕국의 전각건물로 여겨지는 대형건물터와 왕궁 관련 시설물이 발견됐다. 부소산성은 왕궁의 배후산성으로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 위급 시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됐다. 

백제 멸망기 나당연합군이 침공해 왔을 때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왕궁을 떠나 부소산성으로 피신한 뒤 절벽에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 부여를 지나는 금강 줄기를 백마강이라고 부르는데, 백마강가에 솟은 높이 40m 절벽이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낙화암이다. 

다만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당시 백제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낙화암 역시 떨어지는 모습이 꽃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역시 후대의 표현이다.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이라고 기록돼 있다.

부소산성 낙화암 위에 있는 정자인 백화정(위)과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줄기. 사진=김현철 기자
부소산성 낙화암 위에 있는 정자인 백화정(위)과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줄기. 사진=김현철 기자

백제는 찬란했다. 백제 26대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긴 뒤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기강을 세우려 했다. 또 일본에 불교와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등 해외 교류에도 힘써 백제 중흥을 꿈꿨다. 

그래서일까. 사비시기 특히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이 시기 사찰은 31곳이고 이 중 부여에만 20곳이 있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다"라고 밝히기도 했고 "무령왕의 아들인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안다"며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따뜻한 겨울 날씨를 보인 이날, 낙화암으로 가는 길에는 일본사람으로 보이는 여러 명이 고란사 위로 오르고 있었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찰터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가 백제 불교문화로 완성된 상징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정림사지5층석탑은 백제 고유의 석탑으로 완벽한 비례미와 세련된 백제문화를 보여준다. 

한편 정림사지5층석탑에 1층 탑신부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전승 기념문이 새겨져 있다. 백제 31대 의자왕과 그의 왕자 및 700여 명이 중국에 압송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이 7일 동안 밤낮으로 불에 타 거의 남은 건물이 없는 상태에서 당나라 군은 철수에 앞서 이 글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왕궁리유적. 사진=김현철 기자
전북 익산시 금마면 왕궁리유적. 사진=김현철 기자

◇익산, 극락정토 이상향 담은 미륵사지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벨트 도시 익산. 

왕궁리유적은 무왕시기 축조된 왕궁으로 알려진다. 왕궁리유적은 부여 관북리유적에서 발견된 대형건물터와 형태와 규모에서 유사하다. 왕궁리유적은 전체적으로 2:1, 1:1 비례를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설계됐다. 왕궁의 남쪽에는 중요 생활공간으로 북쪽은 후원을 두는 구조는 중국, 일본의 고대왕국에서도 비슷했다.

특이한 점은 왕궁으로 만들어진 왕궁리유적은 7세기 이후 사찰로 그 기능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백제인들에게 불교는 종교를 뛰어 넘어 생활 밀접한 곳까지 스며든 일부였다. 

또 미륵사지는 국내 최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 터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는 미륵사 석탑을 동방에서 가장 큰 석탑이라고 기록돼 있다. 

미륵사지가 뛰어난 점은 3탑 3금당을 지은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이는 미륵이 지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모습을 표현한 매우 독창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란다. 

미륵사지 서원 석탑. 탑의 규모와 정교함에서 탄식이 나온다. 
미륵사지 서원 석탑. 탑의 규모와 정교함에서 탄식이 나온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두 개의 탑만 남아있다. 중원에는 목탑이, 동원과 서원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는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조사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진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일부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동원 석탑은 1992년 재건됐고, 서원 석탑은 2001년부터 해체 보수가 진행돼 20여년 보수공사를 통해 2019년 완료됐다. 이 과정에서 사리봉영기가 발견돼 무왕의 비 사택왕후 시기(639)때로 석탑 건립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백제는 극락정토를 구현하기 위해 미륵사를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륵사는 모든 백성들의 평등한 삶과 구원을 이루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이룩한 결정체라 할 만 하다. 

고대역사를 짚어보는 역사탐방이 이렇게 재밌을 줄 생각 못했다. 조선왕조 500년 27대 왕, 백제가 31대 왕 700년의 역사라하니 조선보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어릴적 소풍으로 의미없이 왔던 기억과 달리 뿌리를 찾는 기분으로 세 도시를 둘러보니 백제 역사가 오롯이 마음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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