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도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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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4년 그러니까 춘추전국시대 노(魯)와 제(齊)나라 간의 전쟁이 있었다. 제나라 군대의 강공에 전세가 기울자 노의 장수 맹지반은 퇴각 명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퇴각하는 행렬 맨 뒤에서 장병들의 안전 퇴각을 돕고 있었다. 전장(戰場)에서는 공격 시 앞장서는 것보다 뒤에 서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인데 빗발치는 적군의 화살 세레에도 마다하지않고 부하 병졸들이 모두 성안으로 피신할 때까지 퇴각행렬을 지휘하더니 성 가까이 와서야 말 채칙을 휘두르며 맨 뒤에 입성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윗사람인 장수가 먼저 안전을 꾀해야 하거늘 으아해 하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비감준야 마불진야(非敢俊也 馬不進也)” “내 감히 뒤에 쳐지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놈의 말이 원체 느려서...”라고, 후일 공자도 이것이 맹지반 장군의 겸손의 극치라며 높이 치켜올렸다.

이와는 정반대의 사례를 보자. 2003년 죠지 부쉬는 무력으로 이라크 후세인 정부를 공격하고(2003. 3. 20.) 40여 일 후인 5월 1일 손수 전투기를 몰아 아부라함 링컨호 선상에서 전국에 중계된 TV 연설에서 <임무수행 완수(mission accomplished)>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고 자유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앞세웠던 부쉬의 이라크와의 전쟁은 오판에서 비롯됐고 그 후 더 많은 미군 사상자와 이라크의 내전 등 중동지역에 더 큰 혼란만을 야기시킨 가장 명분없는 침략전쟁이었을 뿐이라는 ‘AP’통신의 보도에 부쉬의 인기는 최하위권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자 백악관은 곧바로 <임무완수>라는 말은 링컨호의 <해군 임무완성>일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죠지 부쉬의 교만의 극치다.

그토록 불편하던 문 정부가 가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것은 천만다행인데 어느 기독교 모임의 열렬한 지원이 정권교체에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단체의 수장인 선지자를 자청하던 목사는 얼마 전 정치적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선 일이 있다. 이것도 참 가소로운 교만이다.

노자는 도덕경 7장에서 준기신 이신선(俊其身 而身先:나를 뒤로하고 남을 앞세우는 것이 곧 내가 앞서는 길)이라면서 9장에서는 공수신퇴 천지도(功遂身退 天之道)라고 했다. 말하자면 공을 이루고 나면 낯내지 말고 스스로 물러남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다. 이것이 겸손이다.

영어에서 겸손이란 <humility>라고 하는데 그 말의 어원인 라틴어의 <humus>는 <거름>이라는 말이다. 여름에 무성하던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그것들은 썩어서 다른 식물의 밑거름이 된다는 말로 겸손이란 나를 희생하면서 남을 높이고 이롭게 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천국에선 겸손한 자 으뜸이라(마태 18:4)고 했다.

그리스어에 koros(포만), hibris(교만), ate(멸망)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떤 곤경이나 도전을 극복하고 나면 자칫 포만감에 빠져 자신의 능력과 기술을 앞세워 타(他)를 경시, 탄압, 지배하려는 교만심 탓에 또 다른 재난과 새로운 도전에 압도되어 결국 패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문예의 황금기였던 기원전 5세기에 에이스 클레스(Aeschylus)나 소포클레스(Sophokles) 그리고 유리피데스(Euripides) 같은 아데네 작가들이 쓴 비극들은 승리감에 도취한 자가 포만 상태에 빠졌다가 내가 제일이라는 자만심으로 타에 난폭한 존재로 군림하다가 새로운 도전에 압도되어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는 현상을 주제로 한 것이 거의 모두다.

교만은 패망의 근본이라(잠언 18:12), 인심(人心)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고 겸손한 자에게 모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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