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시장 개척‧인재양성’ 등 증권사 한 획 그은 ‘대우증권’ 역사 계승
국내 첫 인터넷 증권사 설립, PEF 출자 승인‧스마트폰 주식거래 ‘최초’

[민주신문=조성호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미래에셋센터원 빌딩. © 뉴시스
서울 중구 을지로 미래에셋센터원 빌딩. © 뉴시스

국내 증권가의 시련의 계절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해 활화산 같이 타오르던 국내 주식시장은 올해 들어 급격히 냉랭해졌다. 코스피지수는 올해 상반기에만 무려 20% 가까이 빠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 사태,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 등 대내외 악재로 경기 침체 우려가 높아지자 투자 자본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증권사들 수익도 반토막나고 있다. 지난해 ‘빚투(빚내서 투자)’ 열풍과 ‘동학개미’ 운동으로 역대급 수수료 잔치를 벌였지만 오히려 부메랑이 돼 돌아온 셈이다.

그동안 ‘호황’ 시기를 보낸 증권가는 최근 사명 변경, 사옥 이전 등에 나서며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에 국내 주요 증권사들의 탄생 역사와 과거를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 국내 첫 인터넷 증권사 출발

미래에셋증권은 1970년 9월 일성신약 창업자인 고 윤병강 회장이 창립한 동양증권을 전신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모태는 1999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설립한 국내 첫 인터넷 증권사 ‘E미래에셋증권’이다.

1997년 미래에셋을 창업한 박 회장은 이듬해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국내 최초 전문 자산운용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잇달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뮤추얼펀드(박현주펀드)를 출시해 90%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박 회장은 자본금 500억 원으로 E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으며, 미래에셋벤처캐피탈이 지분 16.8%를 소유하며 대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E미래에셋증권은 2000년 9월 사이버증권사라는 이미지 탈피를 위해 사명을 ‘미래에셋증권’으로 변경했다.

당시 미래에셋증권은 2004년 국내 최초로 사모펀드(PEF) 출자 승인을 받은 데 이어 2005년에는 홍콩에 해외사무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어 2007년에는 홍콩과 베이징, 베트남 등에도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등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2010년 업계 최초로 스마트폰 주식거래를 선보인 미래에셋증권은 자산관리 전문가가 찾아가는 ‘이동서비스카’를 개시하는 등 증권업계 신선한 바람을 불러왔다.

◇ ‘뚝심’으로 밀어붙인 인수전

당시 미래에셋증권을 국내 증권업계 1위로 올려놓은 데는 ‘KDB대우증권’ 인수가 결정적이었다.

2015년 KDB대우증권 매각작업이 진행되던 때 미래에셋그룹은 국민은행, 한국투자금융지주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특히 인수 직전인 2015년 상반기 기준 KDB대우증권은 연결기준 자산총계 34조9323억 원, 자본총계 4조3049억 원대로 국내 2위 규모의 대형 증권사였다.

이 기간 매출은 2조5403억 원, 영업이익 2962억 원, 당기순이익 2294억 원을 기록하며 업계 수위를 다투기도 했다. 특히 순이익으로는 NH투자증권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같은 기간 미래에셋증권은 자산총계 27조3863억 원, 자본총계는 2조4834억 원이었다.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조9333억 원, 1364억 원을 기록했다.

때문에 미래에셋증권이 KDB대우증권과 합병하게 된다면 명실상부 국내 증권업계 1위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이기도 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미래에셋그룹은 결국 2조3205억 원에 KDB대우증권을 품으며 증권업계 명실상부 1위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증권가에서는 미래에셋의 대우증권 인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박현주 회장은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특히 본입찰 당시 박 회장은 경쟁사 대비 파격적인 인수가격을 제시하며 인수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미래에셋그룹은 KDB대우증권 사명을 ‘미래에셋대우’로 변경하면서 ‘대우’라는 이름은 남겨뒀다.

산업은행이 KBD대우증권 매각을 위한 본입찰을 마감한 지난 2015년 12월 서울 여의도 당시 KDB대우증권 본사. © 뉴시스
산업은행이 KBD대우증권 매각을 위한 본입찰을 마감한 지난 2015년 12월 서울 여의도 당시 KDB대우증권 본사. © 뉴시스

◇ 명실상부 국내 1위 ‘대우증권’

KDB대우증권을 품은 미래에셋그룹은 2016년 12월 기존 미래에셋증권과 합병시켜며 자본금 약 8조 원의 초대형 증권사 탄생을 알렸다.

다만 미래에셋증권이 KDB대우증권에 흡수되는 역합병 방식을 취하면서 ‘E미래에셋증권’의 발자취는 사라지게 됐다. 국내 증권사의 한 획을 그은 ‘대우증권’의 역사를 계승한 셈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해 온 대우증권은 1970년 설립된 ‘동양증권’이 모태다.

동양증권은 3년 후인 1973년 대우그룹(대우실업)에 인수되면서 모기업의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형 증권사로 거듭나게 됐다.

인수 6개월만에 자본금은 설립 초 대비 10배인 5억 원으로 늘었고, 1975년에는 자본금 10억 원을 달성했다.

특히 대우증권은 1983년 삼보증권을 인수하며 명실상부 국내 1위 증권사로 도약했다.

당시 업계 1위를 달리던 삼보증권이 건설주 파동으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게 되자 자금력을 갖춘 대우증권이 이를 인수하게 됐다.

대우증권은 삼보증권 합병 후 당시 업계 최대 규모인 점포망 50개, 직원수 1200여 명, 시장점유율 18%까지 끌어올렸다. 자본금 역시 160억 원까지 늘어났다.

◇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대우그룹에 속한 대우증권은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1984년 8월 업계 최초로 일본 도쿄에 해외사무소를,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뉴욕에도 개설해 운영했다. 특히 뉴욕 증시에 ‘코리아펀드’를 상장시키는 쾌거도 이뤘다.

1986년과 1988년에는 각각 영국 런던과 홍콩에 사무소를, 1989년에는 헝가리 신용은행과 ‘HMB-대우’ 합작은행도 설립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유럽과 미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했으며 베트남, 인도, 루마니아, 우즈벡, 싱가포르 등 글로벌 곳곳에 ‘대우증권’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대우증권은 1984년 국내 최초로 민간 경제연구소인 ‘대우경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인력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대우증권은 리서치 전문인력 양성에 집중 투자하며 국내 리서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곳을 거친 많은 ‘대우맨’들이 현재도 국내 금융투자업계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대우증권은 ‘증권사관학교’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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