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도
장계도

19세기 독일의 서정시인 칼 부세(Cal Bosse)가 쓴 <저 산 넘어 Over the Mountains> 라는 이런 시(詩)가 있다.

“산(山) 너머 저 멀리

행복이 있다기에

아 남들 따라 길 나섰지만

얼굴에 눈물만 얼룩진 체

나는 되돌아왔네

그 멀리 행복이 있다는 말만 듣고 갔다가”

그렇다. 행복은 지금에서 찾아야지 어디로 들 가려는가. 저 멀리 아무데도 낙원은 없다. 당나라 때 임제 선사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어디든 내가 주인이 되면 지금 바로 예가 즉 극락이라고 한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천국이라는 찬송가 495장도 있지 않은가.

천국을 뜻한는 단어도 여러개다. 극락(heaven), 피안(彼岸), 바라밀(Paramita), 서방정토(西方淨土), 낙원(Paradise), 이상향(Utopia) 등.. 이런것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하고 또 이것들은 서로 다르다고 애써 구분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 같은 것이다.

그리스어로 이상향(utopia)을 Ou-topos라고 한다. 허나 그 말뜻은 ‘그런 곳은 없다.’(no such place)라는 말이다. 영국의 소설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가 쓴 1872년 작 풍자소설 ‘에레훤(erehwon)이라는 것이 있다. 그 어디를 헤메어도 “그런 곳은 없다”는 내용인데 그 책 제목을 잘 보자. 실은 (no where : 어디에도 없다.)라는 단어를 거꾸로 쓴 것이다. 또 이 말은 now here(바로 여기)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버틀러의 ’에레훤‘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우매하고 고루한 종교적 도덕적 편견과 잘못된 사회의 전통적 습성을 못버리는 좀 우직한 면을 풍자한 소설이다. 보다 나으리라는 내일에 대한 희망은 나를 이끄는 추진력으로는 좋으나 오늘을 희망하는 우(憂)를 범해서는 않된다. 이것을 헨리 데반 소로우(Henry David Threau)는 “나중 한 바늘의 수고를 덜기위해 오늘 천 바늘을 뜨지말라고 경고한다.

”생일날 하루 잘 먹자고 이레를 굶더니 생일날 아침에 죽더라.“는 말도 있지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유대인의 생활 법전인 탈무드(Talmud)에도” 한 끼의 닭고기를 먹기 위해 여러 날을 굶기보다는 매일 양파를 먹고 사는 게 지혜롭다.“는 말도 있지않은가.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천국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너희가 볼 수 있게 오는 게 아니다. 천국은 바로 네 안(心中)에 있기 때문이다.(누가 17:20~21)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깨우치고 중생(重生)해야 한다. 그러면 알리라.

일제 강점기 한 제자가 만공스님에게 물었다.

“정말 극락과 지옥이 있습니까?”

“암, 있고 말고!”

“그럼 보여주세요.”

이에 만공스님은 다짜고짜로 달려들어 제자의 목을 힘껏 졸랐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에 이른 제자가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그러자 만공스님이 물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냐?”

“죽을 지경입니다.”

파래진 얼굴에 헐떡이는 제자에게 말했다.

“그게 지옥이니라!”

그리고는 만공스님이 제자의 목을 풀어주었다. 이에 제자가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자 만공스님이 물었다.

“이제 기분이 어떠냐?”

“이제 살 것 같습니다.”

그러자 만공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그게 극락이니라!”

레오나드 월갓(Leonard T. Wolcott)은 <바로 여기:The point is here>라는 그의 시(詩)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천국은 오늘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라 오늘을 새롭게 사는 것이다.”라고 ...

서방정토가 극락이라니

그 어디메뇨.

구름은 바로 내 머리 위에 있어

그것만 걷히면 쨍하고 빛이 드는

바로 예가 정토인 것을.

<who is 장계도>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대학 종교단체 초빙강연
칼럼리스트저서 허(:도덕경)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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