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청동방울 유물부터 ‘현대’ 브람스 작품까지…‘시간 초월’ 향연
전시 관람객 “역사 보고 나온 느낌” 소회...백자 달항아리 체험도 이뤄져

[민주신문=전소정 기자]

이달 12일 오전 11시 30분경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관람을 위해 현장예매 및 발권을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이달 12일 오전 11시 30분경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관람을 위해 현장예매 및 발권을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말처럼 그의 수집품들은 철기시대 유물부터 현대 예술작품까지 인간이 살아온 역사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난 4월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4달간 진행하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은 故이건희 삼성 회장의 기증 1주년을 기념해 2만3000여점의 기증품 중 엄선된 355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달 12일 기자가 방문한 서울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박물관에는 첫 관람이 시작되는 오전 10시 이전부터 당일예매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인왕제색도를 전시했던 5월에는 현장예매를 위해 300명까지 몰리기도 했다”며 “현장예매가 회차당 30명으로 정해져 발길을 돌리는 시민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기념전은 회차당 100명이 입장하며, 30분 간격으로 월‧화‧목‧금‧일 총 15회, 수‧토 총 21회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기념전 티켓은 각 회차당 30장씩 당일 관람에 한해 현장판매 되고 있다.

이달 12일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서 정약용 '정효자전', '정부인전'(사진 상단)과 김기창 '소와 여인'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이달 12일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서 정약용 '정효자전', '정부인전'(사진 상단)과 김기창 '소와 여인'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 남녀노소 다양한 관람객…혼잡해도 전시 예절은 ‘맑음’

전시는 수집가가 수집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1실 ‘저의 집을 소개합니다’와 2실 ‘저의 수집품을 소개합니다’ 등 총 2부로 구성됐다.

1실은 ‘가족과 사랑’을 다룬 회화, 조각 작품, 조선시대 생활용품 등 수집가 이건희 회장의 취향과 안목을 감상해 볼 수 있다.

2실은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는 경험’을 표현한 회화‧공예품,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도토기‧금속공예품, ‘생각을 전달하는 지혜’를 담은 종교미술품‧조선시대 서화, ‘인간의 변화’를 탐색할 수 있는 회화‧조각 작품 등을 소개한다.

1회차 입장 시작 5분 전인 이날 오전 9시 55분 기획전시실이 개방되자 대기하고 있던 관람객들이 줄지어 차례로 입장했다.

이날 전시관에는 혼자 온 관람객부터 가족과 함께 찾은 어린아이, 연인, 친구 등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이 방문했다.

또한 입장 후 플래쉬 없이 촬영이 가능한 전시 특성상 작품을 촬영하거나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관람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다만 작품 훼손 등을 고려해 잉크가 들어간 펜, 필기구는 전시관 내에서 사용이 불가하다.

이와 관련 안전한 관람을 돕기 위해 전시관 내에는 16명의 직원이 상시 근무 중이다.

전시관 내 직원은 “외부에 전시된 작품이 많아 훼손 및 관람객들의 안전한 관람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1회차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1실 초입에서 관람객들이 다소 몰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순서대로 차례를 지키며 전시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어수선했던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이에 직원은 “30분 간격으로 입장하기 때문에 보통 4회차에는 전시관이 관람객들로 가득 찬다”며 “오전 11시인 지금은 한산한 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전시관 입구를 지나면 ‘집으로 가는 길, 벅수가 여러분을 맞이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조선시대 석인상이 관람객들을 첫 번째로 맞이하고 있었다.

이어 수집가의 집으로, 수집품이 만들어진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전시된 권진규의 작품 ‘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1실에 전시된 조선시대 석인상, 임옥상 '김씨연대기 Ⅱ',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정약용 '정효자전(상단)'과 '정부인전'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1실에 전시된 조선시대 석인상, 임옥상 '김씨연대기 Ⅱ',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정약용 '정효자전(상단)'과 '정부인전'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 정약용 ‘정효자전’‧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첫 공개

1실 ‘저의 집을 소개합니다’에는 조선시대 동자석 네 쌍, 이종우 ‘부친 초상’, 정약용의 ‘정효자전’, ‘정부인전’, 박수근 ‘아기 업은 소녀’, 이중섭 ‘춤추는 가족’, 이중섭 ‘판잣집 화실’, ‘현해탄’, ‘섶섬이 보이는 풍경’, 곽인식 ‘작품 87-A1’ 등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날 1실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 작품은 정약용이 강진 사람인 정여주의 부탁을 받아 그의 일찍 죽은 아들과 홀로 남은 며느리의 사연을 글로 풀어낸 서예 작품 ‘정효자전’과 ‘정부인전’이었다.

관람객들은 작품 옆 스크린을 통해 정약용이 담고자했던 이야기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관람에 더욱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조선 18세기 백자 달항아리와 달에서 영감을 받은 김환기의 ‘작품’, ‘26-I-68’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물건을 모은다는 것은,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모으는 것’이라는 말처럼 다양한 조선시대 백자, 가구를 1실에서 한 눈에 관람할 수 있다.

1실 관람 동선의 마지막에는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격인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이 있는 연못’이 모네의 정원이라는 컨셉으로 전시돼 있었다.

1실 마지막에는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백자 달항아리’, 동자석 한 쌍 등을 작게 만들어 관람객들이 직접 만질 수 있는 ‘촉각 체험’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한 초등학생 관람객은 촉각 체험 코너의 백자 달항아리 속에 손을 넣고 만져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2실에 전시된 이중섭 '황소', 고려시대 범종, 백남준 '브람스',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2실에 전시된 이중섭 '황소', 고려시대 범종, 백남준 '브람스',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 고려‧조선의 국보‧보물에서 아티스트 백남준으로 마무리

수집품을 네 가지로 나눠 소개하는 2실에서는 이중섭 ‘황소’를 비롯해 박대성 ‘불국설경’, 해학반도도 병풍, 천수관음보살도를 관람할 수 있었다.

빛에 쉽게 손상되는 고서화의 특성상 박대성 ‘불국설경’은 이달 28일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29일부터는 남계우 ‘나비’, 이경승 ‘호접도’로 교체된다.

앞서 ‘불국설경’으로 교체되기 전에는 한 달 간격으로 정선 ‘인왕제색도’와 김홍도 ‘추성부도’ 순으로 전시 된 바 있다.

이후 장승업 ‘옹혼하게 세상을 바라보다’ 등 조선시대 미술품부터 박노수 ‘산정도’, 박래현 ‘피리’등 현대까지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삶을 관찰할 수 있다.

벽면의 ‘자연의 깊은 빛과 색’이라는 문구와 함께 유영국 ‘무제’, 오지호 ‘화물선’을 비교하며 감상해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어 사유하는 인간을 표현한 최종태 ‘생각하는 여인’으로 시작해 고려‧삼국시대에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와 초기철기시대 청동방울, 불교미술품, 옛 고서 등을 연달아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청동으로 만들어진 범종은 선덕대왕신종 타종 소리를 파동으로 표현한 영상과 함께 전시돼 뇌리에 깊게 남았다.

또한 영조와 신하들의 시를 모은 첩인 ‘경현당갱재첩’이 사도세자에게 유난히 엄격했던 영조의 모습을 담은 애니메이션 영상과 함께 전시돼 있어 역사적 비극의 시초를 엿볼 수 있었다.

이어 조선 유학자의 초상화 ‘전우 초상’, 근대서양화가 이인성이 자신의 아내를 주체적인 인간으로 표현한 ‘노란 옷을 입은 여인’, 길가에서 장기를 두는 사람을 그린 박수근의 ‘한일’ 등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화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는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작품 ‘브람스’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달 12일 오전 10시경 기자가 방문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는 8월 28일까지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이  진행된다.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이달 12일 오전 10시경 기자가 방문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는 8월 28일까지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이  진행된다. ⓒ 민주신문 전소정 기자

◇ 13만1251명 넘어선 방문객…"흔치 않은 기회"    

관람을 끝내고 기자가 만난 40대 부부는 미국에서 전시를 예매했다며 “아는 분의 추천으로 오게 됐다”며 “마침 한국에 들어오는 날짜와 시기가 맞아 관람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수집품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며 “관람이 끝나고 수집 작품들을 사회에 선보일 수 있도록 한 이건희 회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를 관람한 50대, 30대 모녀는 “역사를 보고 나온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관람객들이 많았던 5월 이후 현재 기념전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다만 “현장대기가 늘고 있는 추세로, 여름 휴가철에는 관람객들이 더 붐빌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이달 10일 일요일 기준 ‘어느 수집가의 초대’ 관람객은 총 13만1251명으로 조사됐다.

故 이건희 회장은 생전 “전통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긴다”라는 말을 남겼다.

향유(享有)는 누리어 가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회장의 평소 수집 가치관처럼 이번 기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문화유산과 예술 작품들을 편하게 느끼고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이러한 값진 시간과 기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예술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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