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민주신문=이민성 기자] 초콜릿,프라다,아이스크림,크리스탈,롤리팝... 모두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휴대전화다. LG전자는 이 제품들을 만든 휴대전화 ‘전통명가’다.

그러나 현재 LG의 모습은 화려한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LG 모바일커뮤니케이션스(MC)사업본부는 17분기 연속 적자, 스마트폰 국내생산 철수를 맞으며 벼랑 끝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백색가전의 대명사 LG는 과거 ‘휴대폰’도 잘 만들고 ‘가전제품’도 잘 만드는 회사에서 이제는 ‘휴대폰’ 빼고 다 잘 만드는 회사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게 됐다.

1997년 국내에 PCS 서비스가 시작되며 ‘귀족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휴대전화 브랜드 ‘싸이언’(CION)을 출시했다. 사진=동아일보

애플 이전 혁신의 아이콘(ICON) 

LG전자(당시 금성)는 1989년 ‘GHP-9C’라는 이름의 휴대전화를 선보이며 모바일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995년 1월 금성사(社)는 금성통신(주)을 흡수합병하며 LG전자(주)로 상호변경 했다. 이때 LG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휴대전화가 ‘화통(話通)’이다.

이 제품은 당시 혁신 그 자체였다. 국산 휴대전화 중 제일 가벼운 178g의 무게, 지금은 너무 당연하지만 진동 기능과 통화녹음 기능을 포함했다. LG는 화통을 출시하며 4%에 머물던 시장점유율을 두배에 가까운 7%까지 끌어올렸다.

1997년 국내 통신 시장에 개인휴대통신(PCS)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통신시장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부자들만 사용하던 휴대폰이 대중화 시대를 맞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때부터 국내 통신 시장은 유선에서 무선으로 무게중심이 바뀌었다.

LG의 휴대전화 또한 큰 변화를 겪는다. '귀족의 자손'이란 뜻으로 '싸이언(CION)'이란 브랜드명을 세상에 선보이며 LGP-1300F와 LGP-1500F 모델을 시장에 내놓았다. 한글을 24자까지 전송할 수 있는 문자전송 기능과 한글메뉴를 포함하고 있어 휴대전화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LG는 2000년대 들어서 휴대전화 사업부문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는 컬러 액정, MP3, 카메라, GPS, 기능들이 휴대전화에 도입되던 격동기였다, LG는 트렌드와 잘 맞는 CYON(CYber ON)이란 뜻으로 브랜드명을 교체하며 “몇 년 뒤 휴대폰 시장은 카메라와 MP3가 결합된 제품이 장악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예측 했다.

그 결과 경쟁사 삼성보다 먼저 MP3폰을 선보이며 시장의 대세를 빠르게 읽었다. LG의 MP3폰(모델명 LG-LP3000)은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 MP3플레이어, 휴대전화 등 4가지 제품을 융합시킨 첨단기기였다. 이런 기능들 때문에 당시에 50만원이 넘는 고가로 책정됐지만 한달만에 8만대가 팔려갈 정도로 인기였다.

그러나 당시 소리바다ㆍ벅스뮤직 등 MP3 음악저작권 침해 사례가 빈번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면서 LG는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고도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LG전자를 휴대전화 업계 3위로 만들어준 1등 공신 '초콜릿폰'과 '김태희 사진=싸이언광고캡처

전성기 이끈 최대공신은 ‘김태희(?)’

LG는 MP3폰 같은 하이테크 제품을 줄곧 출시했지만 휴대전화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무려 16년 동안 텐밀리언셀러(1000만대 판매) 제품이 없었다.

그러나 휴대전화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항상 기발한 제품을 내놓던 LG는 소비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기능이 아니라 디자인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에 맞춰 디자인을 강조한 제품명 ‘초콜릿폰’을 2005년 10월에 출시했다.

당시 휴대전화에는 드물었던 ‘터치센서’를 적용해 기능적인 면을 살리면서 외관은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검은색과 정열적인 붉은색 LED 버튼을 넣어 주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톱스타 ‘김태희’를 모델로 기용한 공격적인 마케팅에 세계시장에서 총 2500만대가 팔렸다. 초콜릿폰에 힘입어 LG의 영업이익은 1년만에 46.2% 증가했고, 글로벌 점유율도 노키아, 삼성에 이어 3위까지 올라서게 됐다.

자신감을 얻은 LG는 초콜릿폰에 이은 2번째 블랙라벨 시리즈 ‘샤인폰’을 2006년에 출시했다.

당시 기술로는 금속 소재를 휴대폰에 적용하기 어려웠지만 세계 최초로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소재를 사용해 호평을 얻었다. 샤인폰의 CF도 덩달아 화제를 모았다. 김태희가 노래에 맞춰 웨이브 댄스를 추며 엉뚱한 매력을 보여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또 샤인폰은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여심을 훔치며 해외에서도 1,000만 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싸이언은 김태희와 함께 2004년부터 5년간 전성기를 보냈다. 그동안 LG는 김태희를 앞세워김태희폰, 초콜릿폰, 샤인폰, 디카폰 , 아이스크림폰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히트작을 쏟아냈다.

2007년 아이폰의 등장은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가 바뀌는 계기가 됐다. 사진=민주신문DB

대격변 부른 ‘아이폰’의 등장

2007년 1월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일이 생긴다. 애플의 CEO(최고경영자)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하면서다. 그때까지 휴대전화(피처폰) 시장은 MP3와 전화기능의 결합이 대부분이었지만 인터넷 기능은 갖추지 못했다. 휴대전화에 인터넷이 있고 풀터치스크린 조작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이에 질세라 삼성전자는 부랴부랴 스마트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피처폰이 전 세계에 주류였고, 세계 3위에 올라 전성기를 맞았던 LG는 스마트폰을 간과했다.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맥킨지 앤 컴퍼니’의 조언 때문이다.

LG는 맥킨지에 매년 300억을 투자하며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컨설팅을 맡겼다. 맥킨지는 LG에게 기술보다 마케팅 위주로 운영하라는 컨설팅을 해줬고, 당시 LG전자 남용 부회장의 "앞으로 LG전자를 글로벌 마케팅 컴퍼니(Global Marketing Company)로 만들겠다"는 비전과 부합했다.

또 스마트폰은 "찻잔 속의 태풍"이니 삼성에게 내주고 전통적으로 잘 하는 피처폰에 올인(ALL IN)해 해외 저가형 시장을 노리라는 말을 해줬다. 맥킨지를 전적으로 신뢰했던 LG는 스마트폰 사업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지켜만 봤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계기가 생겼다. 바로 최고의 경쟁사이던 삼성이 스마트폰 사업에 큰 실패를 겪게된다. 2009년에 아이폰 3GS가 출시되면서 삼성이 한발 늦게 내놓은 스마트폰은 ‘옴레기’라고 불린 옴니아2였다. 경쟁사의 실패를 지켜본 LG는 ‘롤리팝’과 ‘쿠키폰’등 피처폰이 연이어 대박나며 위험을 무릅쓰고 스마트폰에 투자할 필요는 사라졌다.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LG전자 미국법인 마케팅 디렉터 프랭크 리 (Frank Lee)이 LG V50 ThinQ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판단미스’에 ‘골든타임’ 놓쳤다

위기는 기다리지 않았다. 2010년 이후 ‘아이폰4’가 한국에 상륙하고 경쟁사 삼성이 '갤럭시S'를 출시하면서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급속히 재편됐다. 삼성의 ‘갤럭시S'는 출시 6개월만에 국내서 230만대를 판매됐고 아이폰은 누적판매량이 180만대를 넘어섰다.

뒤늦게 대응하기 시작한 LG는 심각한 부진을 겪었다. LG가 2010년에 국내 시장서 판매한 휴대전화는 총 486만대로 이중 스마트폰은 95만대다. 나름 괜찮은 성적표 같지만 전년대비 판매량이 28% 감소한 수치였다. 30%를 넘었던 시장점유율도 20%대로 떨어졌고 심지어 자사보다 밑으로 생각했던 팬택의 성공을 지켜봐야 했다. 팬택은 스마트폰에 재빨리 대응하며 국내 시장에서 339만대를 판매했다. 이 중 스마트폰은 98만대로 국내시장 2위 LG전자를 앞서기까지 했다.

2010년에만 1조원의 적자를 겪은 LG의 수뇌부들은 결국 줄줄이 사퇴했다. 당시 구본무 회장의 둘째 동생 구본준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2011년에는 LG의 부흥기를 이끌고 14년간 함께한 ‘싸이언’ 브랜드 네임과도 작별하는 변화를 시도했다. 또 1조62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하며 주력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LG가 보통주 대상 유상증자를 한 것은 1998년 12월 이후 13년 만이었다. 사실상 외환위기와 맞먹는 타격을 겪었던 셈이다.

스마트폰 사업에 난항을 겪던 LG는 시장점유율을 반전시켜볼 카드를 꺼낸다. 2012년 9월 구본무 회장의 지시로 모든 계열사의 핵심기술 동원해 만든 ’옵티머스G‘를 출시했다. 이는 LG전자를 주축으로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화학 등이 개발에 참여해 ’회장님폰‘, ’구본무폰‘이라는 별명을 얻게됐다.

출시 3개월만에 글로벌 100만대 판매라는 성적을 거두기까지 했다. 이후 LG는 2013년 G시리즈와 보급형 제품들이 선전해 판매량이 기존 2000만대 수준에서 4760만대까지 급성장했다. 2014년엔 정점을 기록해 3161억원의 흑자를 거뒀다.

그러나 LG의 분투는 여기까지였다. LG는 올해 4월 스마트폰을 담당하는 MC사업본부가 16분기 연속 적자를 탈출하지 못하고 결국 국내서 생산하던 스마트폰 전 물량을 베트남과 브라질로 옮긴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6에는 MC사업본부의 생산인력 감축 및 전환배치를 실시하며 LG의 스마트폰 국내생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LG는 스마트폰 사업은 가장 늦게 참가했지만 5G(5세대 이동통신)는 빠르게 뛰어들었고, 최근 애플을 제치고 2분기 국내 시장점유율 2위 탈환하기도 했다. LG는 스스로 2020년에 흑자 전환이 이뤄질거라 내다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LG는 다시 ‘명가’의 칭호를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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