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를 품다] 내 차로 가는 세계여행1-(20)

<프롤로그> 시동을 걸다

2015년 4월 19일, 아침 6시에 집을 나섰습니다.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둘째 아들 걱정이 앞서지만 떠나는 발길을 재촉합니다. 비가 내리는 새벽길을 달려 동해항으로 오는 동안 메시지와 전화가 운전이 어려울 만치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동안 못나게 살아온 건 아니구나 괜히 마음이 뿌듯합니다. 여비가 떨어지면 꼭 연락하라고 하신 분 수두룩합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넉넉해져 안심이 되었습니다.

빗속을 달려 약속한 10시에 겨우 강원도 동해항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페리사 담당자의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통관업무를 진행합니다. 보세 구역으로 차를 옮겨 세관 검사를 받습니다. 이틀 동안 실은 물품을 혼자서 다 내려 X-RAY검사를 받고 다시 싣느라 오랜만에 땀에 흠뻑 젖어보았습니다. 선내 화물칸으로 차를 옮긴 다음 네 바퀴를 야무지게 결박합니다. 세관원의 안내를 받아 다시 보세 구역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오후 2시. 퇴색한 유행가 가사처럼 뱃고동 길게 울리며 출항합니다. 항구에 비는 내리는데, 선창가에 서서 눈물 흘리는 이도, 손 흔드는 이도 없습니다. 아무도. 모든 사물은 제 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일에 열심히 매진할 때 가장 빛난다고 알고 살았습니다. 모든 것에는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이 세상에 운명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고생을 한 것도 운명이었고, 열심히 노력하여 그 고생을 벗어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없던 중학생이 세계 여행을 꿈꾼 것도 운명이고, 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의 날씨는 험하고 바람까지 드셉니다. 갑판에서의 별 구경은 어림도 없습니다. 떠난다고 연락도, 작별인사도 못한 곳이 많은데 아쉽게도 이 선박은 와이파이가 불통입니다. 거친 풍랑으로 흔들림이 심한 탓에 선내 욕실에서 이리 저리 뒹굴면서 힘들게 목욕을 마치니 쏟아지듯 잠이 몰려옵니다.

힘들겠지만 좋은 여행을 가겠습니다. 어렵겠지만 멋진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목숨 걸 만한 가치 있는 훌륭한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그리고 명심하겠습니다. 이 여행의 최종목적지는 ‘집’이라는 사실을!

독일, 과거 변명 않고 미래 지향

보무도 당당하게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누비던 우리 차가 속병을 앓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랜드로버 서비스 센터에 우선 예약을 해두고 야간 페리를 타고 독일의 로스톡(Rostock)으로 건너갑니다.

‘한 배를 탔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은 제각기 어떤 사연을 가지고 어떤 행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지 궁금해졌습니다. 60억 인구의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모두 바삐 살고 있습니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60억 분의 1, 그중 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60억의 중심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남을 배려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산다면 참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독일에 도착해 후륜의 디스크 드럼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불가사의하게 브레이크 라이닝을 고정시키는 나사들이 양쪽 다 풀려 있었습니다. 특수 공구로만 풀 수 있는 나사들인데. 만만찮은 지출 경비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차가 도로 한 가운데 멈추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동치는 독일의 심장, 베를린

베를린(Berlin)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냉전 시절 베를린 장벽의 중심이었습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부터는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를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상부에 있는 멋진 마차상이 눈길을 끕니다.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는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다가 프랑스와 협상 끝에 되찾아 왔다고 합니다.

독일이 과거를 기억하는 법, 홀로코스트 추모비

홀로코스트 추모비 정보 센터에 들렀습니다. 나치가 어떤 방식으로 유태인을 학살했는지를, 놀랍게도 독일인의 시각에서 표현한 곳입니다. 독일은 전쟁을 통해 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였고,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을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만으로 수없이 학살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넓은 광장에 각기 다른 크기의 수많은 직육면체 콘크리트 조각상들이 배치돼 있고, 얼핏 보기엔 매우 단조로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조각들은 각 개개인의 각기 다른 인생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변명하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배상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자발적으로 공개하고 스스로 먼저 사죄하며 다짐하는 독일 사람들에게 세계대전의 전쟁 책임을 따지는 사람을 근래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독일의 국정 진로를 결정할 때 그 결정이 장차 유럽 전체의 장래에 어떤 형향을 끼칠까 생각하면서 국정을 정한다고 합니다. 여러 면에서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음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로맨틱가도를 달려 오스트리아로

독일 남부의 뷔르츠부르크에서 출발하여 남쪽을 향하여 계속 내려오면 약 400km 정도에 이르는 이 도로를 흔히 ‘로맨틱가도’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로맨틱하고 환상적이며, 그지없이 부드럽고 아늑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도로입니다. 자동차로 독일을 여행한다면, 또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로 여행한다면 꼭 이 도로를 거쳐 가시길 바랍니다.

독일에서 많은 날을 머물며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편견 없이 독일을 느끼고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가족과 합류하여 함께 여행을 다니던 장남과도 뮌헨에서 다시 헤어졌습니다. 이제 오스트리아로 향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