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본 우리 전통문화의 이해

조옥구
한자한글교육문화콘텐츠협동조합 이사장
전 동덕여대 교수

바둑을 두다보면 종종 실수를 하게 되고 그럴 때 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바둑은 다행히도 한판의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 아니고 얼마든지 새로운 마음으로 각오를 다져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1월에서 시작된 해가 12에서 그치지 않고 13월, 26월, 49월, 100월, 638월… 식으로 이어지지 않고 12개월을 단위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되니 설령 실수로 점철된 인생일지라도 각오를 새롭게 한다면 적어도 100번의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첫 달 첫 날은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러 날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 판의 끝을 뒤로 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새로운 판의 첫날이라는 의미에서 의미는 각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둑의 새 판이 그러한 것처럼 무술년(戊戌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겨레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새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우리 우리 설~날을 내일이래요”

설날이 다가오면 동네 어귀마다 새 옷과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는 아이들이 모여 부르는 동요 속에 설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넘쳐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서 ‘설’은 미래 희망과 가능성이 가득 담긴 우리 고유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겨레의 역사를 잃어버린 비운의 후손인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 ‘설’의 의미와 ‘설’이 주는 메시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설’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갑니다.

‘설’이 무슨 말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새해의 첫날이어서 아직 낯설다’. ‘익숙치 않다’는 것이 대체로 타당해 보입니다. 이것을 우리 백자초문 식 한글풀이로 하면 ‘선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어설프게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설날은 지난 365일이 지나고 또 새롭게 365일을 맞이하는 첫날이어서 아직 완전히 섯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설’과 관련해서 또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쇠다’입니다. 보통 ‘설을 쇠다’라고 말하는데 ‘쇠다’의 이해에는 ‘金’자의 훈음(訓音)인 ‘쇠 금’이 도움이 됩니다. 이 말은 ‘쇠를 금이라고도 한다’라는 것이므로 ‘쇠’는 ‘금’과 같고 또 좋은 사이가 깨지면 ‘금이 갔다’라는 표현을 떠올리면 ‘금’ 속에는 ‘사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리가 금이 간 것은 유리에 사이가 생긴 것인데 만일 이 사이의 주체가 하늘과 땅이라면 그 사이는 물이 스며들 정도의 작은 금과는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지나려면 시간이 개입될 수 밖에 없으므로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시간적 개념이 담기게 되어 ‘쇠다’는 ‘지나다’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설’이라는 말 자체가 시간적 개념이며 시간은 언제나 하늘의 해가 주인이기 때문에 시간은 하늘에서 땅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공간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이는 불가피하게 지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을 쇠다’라는 말로부터는 이처럼 ‘새해 첫날 아직 낮 설은 이날을 보내다’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데 이 정도로는 ‘설’의 의미를 망라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설’의 진정한 가치는 이 날을 ‘명절’로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민속에서 ‘명절’이라면 정월초하루와 팔월대보름을 들 수 있는데, 소위 ‘명절’이 다른 날과 구분되는 것은 ‘차례(茶禮)’에 있습니다.

‘차례(茶禮)’는 우리말 그대로 ‘채우는 예’입니다. ‘차다’는 ‘채우다’와 같고 채운다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명절 차례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를 또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차례와 관련하여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차례(茶禮)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조부모나 중시조 시조할아버지가 될 것인데 이 분들은 모두 돌아가셔서 하늘에 계시다고 여겼으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늘과 조상이 동일시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곧 조상이고 조상이 곧 하늘이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한겨레에게 있어서 하늘은 온전한 하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늘만이 온전합니다.

온전한 하늘에 비하여 하늘에서 나뉘어진 땅은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입니다. 하늘은 이 불완전을 내포한 채로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 이 불완전을 해소하기 위해 하늘이 땅으로,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는 완전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우리 겨레의 차례(茶禮)가 시작됩니다. 차례는 한해에 두 번 우리 삶 속에 하늘 채움을 체험하는 의례인 것입니다. 하늘과 함께여야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인데 평소 잊고 지내는 하늘을 찾아 한해의 첫머리와 중간(팔월 대보름)에 하늘과 하나되는 체험을 함으로써 온전한 하나됨을 잊지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망자에 대한 제사로만 여기므로 본질이 많이 흐려졌지만 차례의 본질이 이러하니 제사는 또 어떠하겠습니까?

명절에 타지에 나간 식솔들이 한데 모이는 것이나 잔치에 떡이 빠지지 않는 것 상차림, 제사 순서, 심지어 제사 후에 제사음식을 나누어 함께 먹는 것 등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차례나 제사는 모두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됨을 잊지 않도록 후손들을 가르치는 문화적 제도적 장치인 것입니다.

고대에 제사가 전쟁에 비교될 만큼 중요시되었던 것도 우리 겨레가 죽고사는 일만큼이나 하늘과 하나됨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의 우리의 가치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겨레의 정체성이 이것입니다. 공동체, 궁극적으로는 하늘과의 하나됨.

우리가 집을 집이라 부르는 것이나 마당, 울타리, 마루, 방, 옷, 밥, 국, 반찬 등 우리 의식주가 모두 하늘과 하나됨을 전제로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이웃과의 불화를 방치하고는 하늘과 하나됨을 성취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화목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원수일지라도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까닭 역시 하늘과의 하나됨이 원수를 갚는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罪(허물 죄)’는 ‘네(四)가지가 아닌 것(非)’이 아니라 ‘하나되지 못한 것(非) ’ 긍극적으로는 ‘하늘과 하나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하나됨의 의미와 가치를 먼저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했던 아니 실천 경험을 가진 유일한 종족이 있다면 바로 우리 한겨레일 것입니다.

새 해 첫날 첫 해를 보기 위해 해뜨는 곳을 찾는 수 많은 인파를 보면서 다시금 하나됨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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