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아’ 교도소 자살 내막

- 3년 전 친어머니  성폭행 후 살해, 무기수 복역 중 자살

- 전날 숙모 면회, 중 압감·죄책감 심경의 변화 일으킨 듯
 
 
‘희대의 패륜아’가 수감 중인 교도소에서 자살했다. 자살한 A(22)씨는 친어머니를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하제일의 패륜아라며 손가락질 했다. A씨는 2009년부터 전주교도소에서 복역을 시작했다. 교도소 생활 3년만의 일이다. 교도소 관계자에 의하면 3년은 수감자들이 적응기를 거쳐 안정기에 접어드는 때다. 안정기에 굳이 A씨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A씨는 전주교도소 출력사동에서 지냈다.



지난 4월 23일 오후, 전주시 평화동 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A씨가 교도소 운동장 옆 공장동 처마에서 목을 맸다. 목을 맬 줄은 속옷으로 대신했다. A씨는 교도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운동시간을 택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 무관심에
‘패륜아’ 전락

 
사건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7월 22일 오전 8시쯤 한 20대 청년이 경찰서를 찾았다. ‘자수를 하기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그 청년의 입에선 충격적인 얘기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이다. 같은 달 31일, 전북 익산경찰서는 자수한 A씨로부터 “어머니를 성폭행한 뒤 발각될까 두려워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A씨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취직한 이벤트 회사에서 음향기기 설치 일을 했다. 월 80만원의 급여를 받았다. 석공이었던 아버지는 10살 때 암으로 숨졌다. 그는 가장이었지만 돈을 잘 벌지 못했다. 생계는 불안정했다. 여동생은 2년 전 고향을 떠났다.

2008년에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A씨는 어머니 B씨(당시 40)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어머니인 B씨는 A씨가 7살 때 처음 가출했다. 가출한 지 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B씨는 몰라보게 큰 아들 A씨를 보고 당황했다. 현관문 앞에서 A씨는 무작정 B씨에게 달려가 안겼다. 어려서부터 A씨는 어머니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 후, A씨의 어머니 B씨는 수차례 가출했다. 11살 무렵에는 A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받은 보험금 7,000만원을 들고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 몇 개월 전에는 집수리 명목으로 A씨 앞으로 대출을 받았다. 대출금은 며칠 만에 PC방에서 바닥났다.

그것은 A씨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B씨는 PC방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4~5일간 PC방에서 먹고 자며 게임과 채팅을 한 적도 많았다. 인근 주민들도 모두 알 정도였다. 한 인근 주민은 “A씨를 어릴 때부터 할머니 혼자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에 대한 A씨의 감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버림받은 것처럼 괴로워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한 A씨는 방 안에 있는 B씨에게 ‘회사 다녀왔다’며 인사를 건넸다. B씨는 읽던 잡지책만 봤다. A씨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A씨는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득 방 한켠에 쌓인 채무고지서와 밀린 수도세, 전기세 고지서가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난 A씨는 밖으로 나가 소주 2병을 마셨다.

A씨는 잔뜩 취해 새벽 2시쯤 집으로 들어갔다. 잠든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곁에 누웠다. A씨는 B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결에 B씨는 귀찮다며 A씨를 뿌리쳤다. A씨는 자신도 모르게 B씨를 손으로 쳤다. 몸싸움이 시작됐다.

A씨는 자신을 내리치는 B씨의 손을 잡았다. 힘으로 밀어붙여 성폭행을 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A씨는 “귀찮다고 뿌리치는 엄마와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순간적으로 성욕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또한,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안아주는 것을 좋아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성폭행을 당한 뒤 어머니 B씨는 곧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A씨는 불안해졌다. 어머니가 신고를 하면 자신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무조건 어머니를 쫓았다. 어머니는 화장실로 향했다. A씨는 둔기로 B씨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기를 맞은 어머니는 그대로 쓰러졌다. A씨는 그래도 불안했다. 쓰러진 어머니 B씨의 목을 잡고 숨이 막히도록 졸랐다. 결국 B씨는 숨을 거뒀다.

A씨는 숨 돌릴 틈이 없었다. A씨는 곧바로 일어나 화장실의 핏자국을 지웠다. 숨진 어머니의 시체를 보일러실까지 옮겼다. A씨는 이른 새벽부터 옆집에 달려갔다. 삽과 수레를 빌려 앞마당을 파보기도 했다. 공포가 밀려왔다.

A씨는 2년 전 집을 떠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를 죽이게 됐다고 말했다. 여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친척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A씨는 배신감을 느꼈다. 어머니로 인해 겪은 고통을 함께 나누던 동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잘 이해해주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자수하는 게 가장 나을 것이라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A씨는 앞마당에서 삽과 수레를 내던진 채 가만히 있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그는 자수를 결심했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오전 8시였다. 범행 5시간만의 일이었다.
 
 
평범한 수감생활
이상 징후 없어…

 
A씨는 경찰에 “어머니를 죽였다”고 말했다. 성폭행 사실은 빠뜨린 채였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살해 수법이 잔인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이번 살인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보복성 살인도 아닌데 수법이 잔인한 게 의심을 샀다.

우발적 살인이라 해도 이상했다. 둔기로 내리쳤는데 상대가 우연히 죽은 것이라면 굳이 한 번 더 목을 조를 이유가 없었다. 잔인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상대를 죽여야 할 필사적인 이유가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결정적으로 숨진 B씨의 시신에서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다. 경찰은 A씨를 집중 추궁했다.

사건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A씨는 사건 발생 다음날인 2009년 7월 31일, 어머니를 성폭행한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어머니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사건은 금세 알려졌다.

사건을 접한 이들은 A씨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 생활 18년 동안 친어머니를 성폭행한 사건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A씨가 어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A씨는 패륜아로 불렸다. A씨의 형량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성욕을 만족하려고 친어머니를 성폭행한 뒤 범행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며 “피고인은 평생 수감생활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반성하고 사죄와 참회의 마음으로 살도록 해 교화하는 것이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이상에도 부합한다”며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A씨는 사건 발생 3년 뒤인 지난 4월 23일에 속옷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A씨는 감시가 비교적 자유로운 운동시간에 사라져 일을 벌였다. A씨의 시신은 운동시간이 끝날 즈음 인원점검을 하는 교도관에 의해 발견됐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교도소 관계자에 의하면 A씨의 교도소 생활은 평범했다. A씨는 무난한 이들끼리 모여 생활하는 ‘출력 사동’에서 지낼 정도로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출력 사동은 6~10명 정도의 출력수가 3평 남짓한 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출력수는 일과시간에 일을 하러 나가는 재소자들을 일컫는다.

교도소 관계자는 “자살 징후는 없었다”며 “특이사항이 있었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신경 썼을 것”이라고 했다. 관계자는 이어 “A씨는 무기수이기 때문에 수감 3~5년 정도 넘으면 안정기로 본다. 특이 소견도 발견되지 않았고, 계장과의 상담에서 별다른 고민을 내색하지 않았다. 상담을 통해 선뜻 속내를 드러내기도 어려웠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또한 관계자는 “종교 활동은 없었다”고 말했다. “종교를 통해 참회했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보통 수감자들은 적응기가 지나고 나서야 종교를 갖는다. 그가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반성을 하다 보니 중압감이 들고 죄책감에 자살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끝으로 관계자는 “굳이 특이사항을 찾자면 사건 전날 숙모가 면회를 왔다”며 “그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모르겠다. 면회는 한 달에 한 두 번은 있었다. 여동생이나 친척들이 왔다”고 밝혔다.

현재 전주교도소측은 당시 수감자과 교도관을 상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 중에 있다.

                                                                    최설주 기자   aucsj@naver.com
 
 
여중생 납치 사건 전모
“사람 그리워…”

지난 4월 25일, 길거리에서 여중생 A(13)양을 납치해 자신의 집에 감금한 혐의로 김모(30·무직) 씨가 붙잡혔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사람이 그리웠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며 범행동기를 진술했다.

그는 4월 24일 저녁, 여중생에게 수갑을 보여준 뒤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보여준 수갑은 3개월 전 부산 북구 군포 시장 부근의 한 노점상에서 3만원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그는 A양에게 현재 조사 중인 사건의 용의자와 비슷하다며 같이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A양은 얼어붙은 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A양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김씨는 A양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끌고 갔다. 북구 구포동 자신의 집에 도착한 김씨는 A양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테이프로 발을 묶은 채 14시간 동안 감금했다.

A양의 어머니는 딸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자 걱정했다. 그녀는 “형사라는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왔는데 북구청 앞이다”라는 내용의 전화가 온 뒤 연락이 끊긴 A양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는 재빨리 진행됐다. 1,000여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전화가 왔던 최종 위치를 파악해 구포동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 일대를 탐문 수사 하던 경찰은 한 주민이 “경찰 행세를 하는 남성이 있다”며 “내가 아는 여성도 납치됐다 탈출했던 적이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납치 경험이 있는 여성을 찾아가 김씨의 집을 알아냈다. 14시간 만에 김씨를 붙잡았다. 경찰 조사결과 김씨는 이날 A양을 집으로 데려와 침대에 눕힌 뒤 팔베개를 해주며 끌어안는 등 친밀한 형태로 대화를 나누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김씨가 A양을 납치할 때 김씨의 어머니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녀는 시각·청각장애에 정신분열을 앓고 있던 탓에 아들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15년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는 그간 뚜렷한 직장을 가져본 적 없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에게 지급되는 돈으로 근근이 먹고 살았다. 어머니를 돌보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연민이 일었다. 대화 상대도 없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사람이 그리워 그랬다’고 털어놓았다”면서 “아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외로움이 비뚤어진 범행을 낳은 것 같다. 김씨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지만, 경찰 행세를 하며 어린 소녀를 납치한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인 만큼 법적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김씨의 어머니는 인근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다.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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