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총리가 돌아왔다. 지난 8월 “빈둥거리는 자유를 누려보겠다. 낮은 곳을 비추는 지성인으로 돌아가겠다”던 정 전 총리가 퇴임 4개월여 만에 다시 일선에 복귀했다. 컴백 무대는 ‘동반성장위원회’다. 형식상으로는 민간기구에 속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핵심 국정과제로 내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도울 실질적인 집행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된 정 전 총리의 역할과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이로써 정 전 총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갈등의 최전선에서 조율을 맡으며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정 전 총리가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자리를 맡아서 책임이 무겁다”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된 정 전 총리의 향후 행보와 최근 근황을 쫓았다.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지수 측정할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내정

총리 퇴임 이후에도 MB와 지속적 유대관계 유지 ‘여권 잠룡’ 재부각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정운찬 전 총리는 여전히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다. 30년간 교수생활을 하는 동안 쌓아온 책들을 모두 집에 옮겨 정리를 하면서 그간 소원해진 지인들은 물론 학계, 정치계, 연극계, 프로야구 두산 선수들까지도 두루 만났다. 퇴임 한달여 만엔 농어촌의 헌집을 고쳐주는 봉사단체인 ‘다솜둥지복지재단’의 상임고문을 맡아 활동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강남대, 해군사관학교, 일본 도쿄대, 경상대 등 특별강연회도 연달아 가졌다.

청와대의 러브콜도 끊임없었다. 정 전 총리는 청와대의 요청으로 충남에서 열린 세계대백제전 개막식에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데 이어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나이지리아의 독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뿐만 아니다.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열린 ‘AJA2010서울포럼-G20서울정상회의와 아시아 언론의 시각’ 포럼에 참석해 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줬다. 총리직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정 전 총리가 여전히 이 대통령과 연결 고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MB ‘애프터서비스’ 약속


이에 따라 일각에선 퇴임 이후에도 이 대통령과 유대관계를 지속해온 정 전 총리가 여권의 잠재적 대선후보군으로 위치를 재확인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특히 이 대통령이 정 전 총리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가졌던 사석에서 “정 전 총리는 내가 애프터서비스 해줘야 한다”고 말한 바 있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정 전 총리의 행보에도 이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펜실베이니아대, 럿거스대 등 미국 명문대학들로부터 석좌교수 제의를 잇달아 받았지만 정 전 총리의 최종 선택은 국내에 남아 국가경쟁력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지난 13일 개소식을 갖고 공식 활동에 들어간 ‘제주-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범국민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수락한데 이어 같은 날 출범한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된 것. 특히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직 내정은 세종시 역풍으로 낙마한 정 전 총리를 안타까워하던 이 대통령의 뜻이었다는 후문이 나오고 있어 정재계의 이목을 끌었다.

앞으로 정 전 총리가 몰두하게 될 동반성장위원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회공익 부문 출신이 참여하는 민간기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지표인 ‘동반성장 지수’를 산정 및 공표하고 기업들이 출연한 1조원대의 동반성장 기금을 관리하는 등 정부가 추진 중인 동반성장의 실질적 집행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된 정 전 총리의 역할과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이 대통령 또한 “정부가 동반성장에 간섭하면 한계가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스스로 하도록 해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민간위원회를 만들었다”면서 정 전 총리에게 힘을 실었다.

하지만 정 전 총리의 동반성장위원회 입성과 관련해 재계와 위원회 안팎에서 정반대의 평가를 내놓고 있어 전망이 그리 밝진 않다. 일단 위원회 측에선 정 전 총리의 선임에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저명한 경제학자로서 민간과 경제계를 아우르고, 전 국무총리로서 정무를 내다볼 수 있는 정 전 총리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에서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은 정 전 총리가 총리 임기를 마치기 직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과제였던 만큼 그 기대가 더욱 크다. 실제 정 전 총리는 총리 사퇴 발표 직전에도 중소기업 인사들과 막걸리를 기울이며 “대기업이 힘이 세니까 불합리한 기업 관행이 있다. 내가 중소기업을 위하는 게 신문에 나서 대기업들이 위축될까 걱정”이라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에 한 측근은 “정 전 총리는 세종시 수정안 추진, 용산참사 해결, 3불 정책 폐기 등 우리 사회 갈등의 최전선에서 언제나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면서 “중량감과 전문성 등 여러 측면에서 정 전 총리만한 분을 찾기 어렵다”고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 전 총리에 대한 반발감도 일어나고 있다. 내년부터 전기, 전자, 기계, 자동차, 조선, 건설 등 6개 업종 50~60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발표될 동반성장지수의 공정성에 일부가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의 핵심은 정 전 총리를 ‘민간인’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반성장위원회 출범 과정에서 정부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 바로 민간 주도의 자율적 운영이었지만, 정 전 총리는 현 정권 관계자와 다름없다는 것. 4개월 전까지 총리직에 있었던 사람을 순수 민간인으로 납득하기엔 어렵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정 전 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위원회가 정부의 입김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번 선임은 ‘민간’과 ‘자율’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게 재계의 설명이다. 사실 재계의 우려는 이보다 더 크다. 공정사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바람이 강하게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낮은 점수라도 받게 될 경우 후폭풍이 적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즉, 동반성장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일부 대기업은 신규사업 진출에 큰 영향을 받게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재계에서 그간 동반성장위원회의 수장으로 누가 임명될 것인지 관심을 보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재계는 정 전 총리의 선임을 두고 ‘전형적인 관치인사’라는 비판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는 위원장 선정 과정의 불투명성도 한 몫 했다. 당초 정부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위원장 후보를 물색하되 선정은 민간에 맡기기로 했지만 일련의 과정이 비공개됐다.


내년 수첩에 일정 빼곡


동반성장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본격 활동에 나서기 전부터 구설에 오른 정 전 총리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 전 총리는 지난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지식경제부와 중소기업청 업무보고에 참석하며 “동반성장위원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진정성 있는 소통과 실천의 구심체가 아닌가 한다”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업계 간 대화와 소통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 전 총리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정 전 총리의 보폭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내년 초엔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에서 ‘한국경제와 교육’을 주제로 세미나를 가질 계획이다. 당장 1월에는 중국에서 열리는 ‘중국 컨퍼런스’에 전직 총리 자격으로 초청받은 상태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부주석과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도 만날 예정이다. 사실상 정 전 총리의 수첩에는 내년까지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있다는 전언이다.

한편,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한 김태호 전 경남지사는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지난 8월 총리 후보자직에서 사퇴한 뒤 고향인 경남 거창에 머물면서 지인을 만나는 것 외에는 책을 읽는 등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김 전 지사는 6개월간 중국 베이징대 경제학원에서 연구원 자격을 얻어 지난 10월20일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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