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부터 25세 이르는 청년 끌려와 콩 찌꺼기 먹고 석탄 캐
“일본은 진실 앞에 사과하고 보상해야”…역사 명기 이행해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아버지와 함께 군함도로 끌려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구연철씨가 지난 25일 생생한 강제징용의 실상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허홍국 기자

[민주신문=허홍국 기자] 군함도(하시마 섬)는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2015년 MBC 무한도전을 통해 조명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군함도를 근대화 산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신청하려 했고 한국은 반대했다. 일본 근대화 산물에 우리의 강제징용 노역 등 아픈 역사가 자리 잡고 있지만 일본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일본은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강제 노역에 대해 명시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뜻대로 진행했다. 하지만 그 이행 조건은 이행되지 않았고 일본은 군함도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 내국인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에 분노하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적지 않다. 구연철(1931년생ㆍ부산 해운대구 거주)씨도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아버지와 함께 군함도로 끌려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유족 중 한분이다. 민주신문은 그를 지난 25일 영화 ‘군함도’ 시사회가 열리는 서울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 CGV에서 만나 생생한 강제징용의 실상을 들어봤다.

- 역사적 아픔이 있는 곳이 영화로 그려졌다. 현재 소감은.

“감옥의 섬이다. ‘군함도’라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섬 모양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 군함도 역사를 말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나라가 없는 민족, 조국이 없는 민족은 그렇게 처절한 노예생활을 하는가 보다는 것을 느낀다.”

- 당시 강제 징용으로 끌려왔던 사람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생활했나.

“대부분 16세부터 25세 이르는 젊은 사람들이 끌려왔다. 내가 살던 집은 목조건물 2층으로 아래층 방 한 칸 위층 방 한 칸 구조였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물부터 식량까지 모든 것이 배급됐다. 초기에는 쌀과 콩을 줬지만 식량이 없어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 즉 대두박을 줬다. 대두박은 삶아서 먹었지만 먹기 힘들었다.”

- 당시 근로 환경과 임금 착취에 대해 설명해 달라.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헬멧 쓰고 곡갱이 하나씩 들고 (하시마)탄광으로 들어갔다. 탄광사무소에서 강제징용 된 사람을 폭행하는 장면도 본적이 있다. 처참한 삶을 살았다. 영화에서처럼 노동자 장부가 있는지 구체적인 것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비슷한 것을 본적은 있는 것 같다.”

- 군함도는 언제 다녀왔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난해 10월 70년 전 살던 집을 보기 위해 군함도에 다녀왔다. 내가 다니던 학교, 병원, 강제징용 노동자 청년 합숙소를 그리며 갔는데 일본이 통제해 들어가지 못했다. 해방 전 군함도 출입구에는 ‘영광의 문’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일본인지 조선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글귀는 ‘지옥의 문’으로 바뀌었다. 최근 방문할 때는 없어졌다.”

- 강제징용노동자 유족으로서 사과와 피해보상을 받은 적이 있나.

“사과는 물론 보상 받은 것이 없다. 일본은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한다.”

이날 영화 시사회에는 강제징용으로 고통을 받았던 노동자의 아들 구연철씨와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이희자씨, 피해자 이세인씨, 최낙훈씨, 정유언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

이희자 대표는 “전쟁의 혹독함과 강제징용의 말 못할 고생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본은 군함도를 세계 유산에 등재하면서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며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또 반성해야 하는지. 더나가 일본을 다시 직시하고 역사의 아픈 날을 되새겨 보는 교훈과 교육이 될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구연철(오른쪽)씨와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25일 왕십리역 CGV 5관에서 열린 영화 ‘군함도’시사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허홍국 기자

숨 막힌 전율

군함도 영화는 스토리 흐름이 빠르게 전개되고 음악이 조화를 이뤄 몰입도가 높았다. 영화 상영 내내 관람객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더욱이 영화 속 인물인 이강옥 단장과 그의 딸 소희의 티격태격한 일상 장면에서도 장내는 웃음이 피어나지 않았다. 무거우면서 숨소리를 죽이는 듯 고용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1945년 8월 1일 나카사키 원폭이 그려지고 아버지를 잃은 소희의 모습이 대미를 장식했다.

시사회 현장 관람객들도 이구동성으로 무거운 기운을 받았다.

백모(30대ㆍ서울 성동구)씨는 “일본이 강제징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지금 시점에 필요한 영화다”라며 “소재는 역사적 사실인데 픽션 가미된 스토리여서 아쉽고 총격전으로 인한 시체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조금 무거운 느낌을 받는다”고 시사회 소감을 말했다.

강혜진(30대ㆍ서울 은평구)씨는 “두 시간 가량 영화가 진행됐다. 웃음 코드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숨이 막힌다. 소희가 마지막에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서경덕 교수는 일부 픽션의 아쉬움에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영화 작품으로서 대하자는 입장을 피력했다.

서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일부 픽션에 대한 아쉬운 반응에 대해 “‘군함도’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예술작품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유대인 학살을 그린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같이 영화가 널리 알려져 군함도 진실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적 사실을 영화라는 문화콘텐츠를 일반 대중들에게 전파되는 것 만해도 긍정적으로 본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서 교수는 “일본은 강제 강제징용노동자들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피해보상을 해야한다”며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를 하지 않는 일본은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군함도는 나가사키 항으로부터 남서쪽 해상 약 18.5㎞ 위치한 작은 섬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600~800여명이 강제 징용돼 고통을 받은 곳이다. 120여명의 강제징용노동자가 1000m 지하 갱도에서 하루 12시간씩 석탄 채굴을 하다 희생됐다. 일본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서 강제로 노동력을 공급했고 탄광은 1974년 1월 폐광됐다. 현재는 나가사키 시 소유로 관광단지로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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