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인간 소모품

<전편 이어서>

고참 조교가 감정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생존 훈련에 들어간다. 뱀처럼 이동하여 두더지처럼 은신해야 한다. 대항군 조교들의 수색은 밤 8시부터 시작된다. 총알을 발사하는 경우는 없겠지만 수색 중에 총검이나 죽창으로 땅바닥을 찌르게 되니 참고하기 바란다. 사흘 후 잠적 해제 방송이 개시되면 한 시간 이내로 바로 본부까지 도착해야 한다. 신속정확! 즉 은밀한 곳에 비트를 파고 잠적하는 건 좋지만, 너무 멀리 벗어나는 건 일종의 도망과 같다는 얘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그럼 실시한다!” 2인 1조로 이뤄진 대원들은 지도와 나침반을 지닌 채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청운은 ‘개호주’라고 불리는 녀석과 한 조가 되어 움직였다. 입소 첫날 자기소개 때, 시끄럽게 짖어대는 애완견을 잡아먹고 여자 주인의 처녀성을 복수심으로 농락했다고 떠벌이던 바로 그놈이었다. 간혹 눈을 짐짓 음흉스레 뜨고 노려보며 코를 크게 벌름거리는 게 버릇이긴 해도 속은 순박한 편이었다.

“이쯤이 어떨까? 한갓지고 수풀이 우거져 괜찮을 듯한데….” 청운이 말했다. “아냐, 이런 음침한 곳일수록 조교 애들이 더 들쑤셔 본다구. 저리 좀더 올라가 보자구.”

개호주가 습관적으로 콧바람을 불어내며 대꾸했다. 그 넓고 깊은 숲속에서 막상 은신처를 찾으려 드니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실전 같은 상황이니만큼 대충 장난삼아 섣불리 하다간 정말 큰코 다치든지 운이 나빠 뒈질 수도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고요 속에 구슬픈 두견새 울음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한동안 더 올라가자 청량한 물소리가 나더니, 어둠을 배경으로 허연 폭포가 마치 벌거벗은 여인이 추는 격렬한 춤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개호주가 말했다. “야, 어떤 감이 오지 않냐? 고불고불 허리를 돌리듯 떨어지던 물이 저 아래에선 치마처럼 퍼지면서 곧장 떨어져 내리잖아.”

“응.” “어릴 때 만화를 보면 꼭 저런 곳에 동굴이 있거든. 만화처럼 큰 동굴은 없겠지만 작은 굴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어. 야, 한번 가 보자!”

산속에서의 생존게임

개호주는 말을 맺기도 전에 산길을 살짝 에돌아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으로 내려갔다. 청운은 헛소리 같아 망설이다가 그냥 서 있기도 심심쩍어 슬슬 뒤따랐다.

가까이서 보니 구룡폭포처럼 웅장하진 않았지만 세찬 물살이 바위 턱에 부딪혀 사방으로 무섭게 물보라를 튀겼다. 설령 그 속에 은신할 만한 굴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도 개호주 놈은 모험을 즐기는 아이처럼 슬금슬금 다가갔다. 하반신이 물에 잠기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허연 폭포수가 침범자를 때려잡듯 녀석의 정수리를 퍽퍽 내려쳤다. 문득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물속에 주저앉았나 싶어 살폈으나 흔적도 없었다.

“야, 어디 있어?” 잠시 후 녀석의 모습은 안 보이는 채 목소리만 들려왔다. “떠들지 말고 어서 이리로 와. 남한테 들키기 전에…….”

청운은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주렴처럼 떨어지는 폭포수 안쪽 암벽에 움푹 패인 곳이 있었다. 거기서도 물이 흘러나오는 듯이 보였으나, 실은 떨어지던 폭포수 일부가 약간 튀어나온 바위 턱에 부딪혀 안쪽으로 살짝 휘어져 들었다가 흐르는 것일 뿐이었다.

굴 입구는 좁아서 근골 축소술을 써서야 겨우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 넓어졌다. 하지만 두어 발짝이 끝이었다. 그 뒤는 막혀 있었다.

청운은 일단 울퉁불퉁한 바위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좁아서 드러누울 순 없을 듯싶었다.

“어때? 아방궁 같지 않냐? 딴놈들은 지금 한창 비트 파느라고 생고생일 텐데 말야.”

개호주가 배낭을 벗어 지퍼를 열며 말했다. “글쎄, 괜찮을까? 이미 조교들이 알고 있는 곳일 수도…….”

청운이 조심스레 대꾸했다. “흐흐…… 나도 이미 검토해 봤어. 하지만 아닌 것 같아.” “어째서?” “폭포 앞 입구에 거미줄이 쳐져 있는 것도 좀 이상스럽다면 이상한 노릇이지만, 더 야릇한 건 말야….” “뭔데?” “여기 해골과 뼈가 있어.”

“뭐?” “누군지 모르지만 단 한 구의 시신이 여기 기대앉은 채 죽어 서서히 탈골이 된 것 같아. 유골이 단정한 모양으로 보아 타살이기보단 자살이 아닌가 싶어. 암튼 비밀굴인 것 같아.”

“그걸 어찌 알아?” “짜식, 교육훈련 시간에 잠이나 쿨쿨 잤나 보군. 추리를 해봐. 만약 누가 발견했다면 치워버리든지 묻어 주지 오랫동안 이렇게 그냥 뒀겠어?”

청운은 라이터를 켜서 비춰 보았다. 구석에서 허연 해골이 검은 눈구멍으로 우는 듯 웃는 듯 외롭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마주 보았다.

“대체 누굴까?” 청운은 놀라움을 누르고 물었다. “내가 지하 골방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할 때…… 사실 지겨워서 이른바 불온서적이란 것도 좀 봤는데 말야…… 커다란 동굴이나 구덩이 속에 암장된 유골들이 홍수가 날 때 드러나기도 한다는데…… 그게 다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한테 총 맞아 죽은 평범한 애먼 국민이란 거야. 북한 공산당에 협조한 빨갱이라면서. 그런데 사실은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대. 공무원들이 나서서 국민보도연맹이란 곳에 가입하면 보리쌀, 비료, 고무신 따위를 준다고 꼬이기도 하고 강압적으로 눈을 부라리며 도장을 찍게 하기도 했다더군. 할당량을 채우면 표창장도 주고 승진도 시켜 주니까 마구 설친 거지. 농부들이야 혹시 무슨 손해를 볼까 두려워서라도 가입을 했겠지. 그때 이미 진짜 빨갱이나 부역자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정부에 충성하는 양민들만 남았는데도 그런 허깨비 악당 짓을 한 거야. 국가의 이름으로 수십만 국민을 마치 개미나 파리처럼 쏴 죽여서 한꺼번에 구덩이 속에 파묻어 버렸다니 믿을 수가 있어?”*

*얼마 전, 6.25전쟁 때 수많은 희생자를 낸 국민보도연맹을 조직·관리한 것으로 알려진 ‘반공 검사’ 선우종원 씨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그는 서울지검 검사, 법무부 초대 검찰과장,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등을 지내면서 좌익 전향자 등을 모아 보도연맹을 만들고 관리한 주역이다.

그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성향을 묻는 질문에 “삐라를 뿌리다 잡힌 사람들은 남로당 등 아무 곳에도 가입한 적 없는 진짜 농민들이었다. 공산당으로 볼 수 없었다. 의식분자라기보다 오히려 순박한 국민들이 많았다.”라고 밝힌 뒤 “보도연맹원 학살은 경찰이 주도하고 군인이 뒷받침했다. 경찰이 단독으론 절대 못한다. 군에서 하라고 하니까 했지.”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국가권력이 공산당원이 아닌 걸 알면서도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한국전쟁 전국유족회 등은 한국전쟁이 벌어진 뒤 전국에서 보도연맹원 20여만 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무서운 일이야. 저 해골도 그런 학살을 피해 숨어 있다가 미쳐 죽은 사람이 아닐까?” “모를 일이지.” “야, 으스스한데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운명에 맡기고 일단 있어 보자구.”

그리하여 아방궁이 아닌 좁은 암굴 속에서의 잠적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나저나 아랫도리가 다 젖어 으스스하군. 불을 피울 수도 없고…….”

“너처럼 꺼벙한 놈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여기까지라도 살아왔냐? 어서 나처럼 바지와 신발을 벗어 말려라.” 청운은 훈련화만 벗었다. “바지는 왜 안 벗냐? 니가 만일 여자였다면 여기가 바로 화촉동방華燭洞房이 되는 건데 말야.” “짜식이 헛소리는…….” 청운은 눈을 흘겼다. “아따, 여기서 어찌 사흘을 견디냐? 아무튼 조교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한 꼬바리부터 하고 보자구.”

개호주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 입으로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하얀 종이로 포장되어 담배 이름도 그림도 없는 그 ‘백담배’엔 성욕 억제 성분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청운은 자신이 직접 만든 솔잎 담배를 조심스레 꺼내 피웠다. 마른 솔잎을 가지런히 모아 종이에 만 그것은 강렬한 중독성은 없지만 담백하고 향긋한 매력이 있었다. 또한 연기가 나지 않아 추적자들에게 발견될 위험도 적었다.

“아따, 무슨 맛에 그걸 빨고 앉았냐, 응?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이라도 할랑가 보네. 야, 이 담배에 성욕 억제약이 들어 있다면 또 어떠냐. 어차피 쓸 수도 없는 성욕인데 말야.”

“꼭 그것 때문은 아냐.”

“그럼 뭔데?” “그냥 왠지 싫어서…….” “짜식, 괴팍스럽긴. 그런데 무슨 가랑잎이나 마른 잔디 따위를 담배 대용으로 말아 피운다는 소린 들었지만 갈비는 좀 생소한걸.”

“옛날에 지리산 빨치산들이 창안해 낸 담배라는 얘길 얼핏 들은 적이 있어서 한번 만들어 봤지.”

“그건 또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노?” “선감도라는 곳에서.” “너도 선감도에 있었었구나. 지독한 곳이라고 하던데…… 그곳 출신으로 꽤 재미있는 놈을 하나 알고 있지.” “스라소니……?” “그놈이야 음흉하지 재미있다고 할 수 있냐.” “그럼 누구?” “잠깐, 조용히 해봐. 조교 놈들이 슬슬 사냥을 시작하는가 본데…….”

멀찍이서 낙엽 밝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폭포수 소리 때문에 흐릿하긴 했지만 두런두런 말소리도 났다. “이 자식들이 두더지 새끼처럼 제법 감쪽같이 숨긴 숨었군. 허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뭐.” “저쪽이 쫌 이상하니까 한번 찔러 봐. 좀 더 세게 쿡! 내가 경험상 보니깐 슬쩍 찌르면 놈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꾹 참아내더라니까.” “한 마리당 몇 만원씩 상금이 있으니 몇 마리 잡아 보자구.”

은신술

비트 잠적은 공작원들이 북한 지역에 침투했을 때 목숨을 최대한 유지해 나가기 위한 은신술이었다. 하나의 공작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현장 상황에 따라 하루가 걸릴 수도 있으나 사흘 이상 한 달을 넘길 경우도 있다. 만약 북한군에 발각돼 포위당하는 시점엔 두더지처럼 땅으로 들어가 무한정 버텨내야 하기에 가장 힘든 훈련이기도 했다. 야전삽으로 최단시간에 항아리 모양의 땅굴을 파고 그 위에 솔가지 따위를 얼기설기 걸친 다음 낙엽을 덮어 위장한 뒤 그 무덤 같은 곳에 웅크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판초 우의 하나로 견뎌내야 한다. 만약 재수 옴붙어 저승사자 같은 검은 모자 조교들에게 발각되면 곧바로 지옥행이었다.

“야, 저놈들 딴데로 가나 보다.”

개호주가 소곤거렸다. “아냐, 저건 낙엽이 아니라 물을 찰박찰박 밟는 소리 같은데…….”

“그건 네 마음이 너무 예민해졌기 때문일 거야.” “정말 다가오는데…….”

청운은 귀를 곤두세웠다. “그게 환청이란 거야. 내가 전에 개 짖는 소리를 못 참아서 잡아먹어 버렸지만…… 너무 싫어서 증오하다 못해 개소리에 공포감을 갖게 되니까…… 나중엔 창문 여닫는 소리뿐만 아니라 간혹 내 자신의 숨소리까지도 무심결에 그놈의 개소리처럼 들려 화들짝 놀라곤 했었지. 그뿐인 줄 아냐. 나중엔 사람의 얼굴마저 서서히 길쭉해져 개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더라니까.”

청운은 가능하면 텅 빈 마음으로 선입견 없이 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잡념에 사로잡힌 마음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조교 놈들이 다시 이쪽으로 내려오진 않겠지. 벌써 아홉 시가 넘었네. 긴장이 풀리니 슬슬 배가 고프군. 야, 일단 뭘 좀 씹고 보자구.” “그럴까.”

둘은 배낭을 열어 건빵과 미숫가루를 꺼냈다. 군용 그릇에다 폭포수를 받아 미숫가루를 탄 후 건빵 몇 개를 띄워 슬슬 불려 가며 어둠 속에서 먹었다. 후래시라도 켜면 좀 아늑해지겠지만 비상시를 위해 최대한 아껴 두어야 했다.

“너 아까 선감도 출신의 재미있는 사람을 안다고 했잖아. 어떻게 만났어?” 청운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흐흥,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청량리 풍전 나이트클럽에 좀 있었거든. 거기 밤무대에 인기가수나 코미디언들이 많이 출연했었지. 나훈아와 남진을 비롯해 이미자와 김추자 그리고 배삼룡과 서영춘 등 기라성 같은 연예인들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어. 흠, 그때가 그립기도 하군.”

녀석은 추억에 젖어 멜랑콜리한 곡조를 콧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런데 왜 나왔어?” “흥, 아까 말한 선감도 어릿광대 때문이었지.” “어릿광대라구?” “응, 앞니 빠진 어릿광대 녀석이었지. 그런데 너 왜 갑자기 긴장하냐?”

“아냐, 그냥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나이는 몇 살쯤 됐었지?” “나보다 한 살 많다고 해서 그냥 뭐 맞먹었는데, 겉보기엔 스무 살도 더 먹은 것처럼 늙어 보이더라.”

“혹시 이름이 김순식 아니었어?” “그건 모르지. 그런 데서 본명을 잘 밝히진 않거든. 우린 그냥 엿장수라고 불렀어.” “엿장수?” “응, 걔가 홀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시다바리 턱이었는데, 꿈이 채플린 같은 위대한 희극배우라 손님이 뜸한 막간에 잠시 등장해 엿장수 흉내를 냈었거든. 조선의 채플린 같은 존재가 되겠다나, 허허…….”

김영권 작가

작가: 김영권

진주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으며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다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仙甘島 수용소의 비밀 보리울의 달 등이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취재해서 르포 시장의 하루 「보통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현재는 지옥극장 시리즈 제3탄 몽키하우스를 집필중이이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진실을 찾아 드라마틱하게 소설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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