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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신문] 드디어 윌리엄 새들러(이하 새들러)의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하 서드에이지)” 마지막 회다. 단순한 책 리뷰가 아닌 필자의 시각에 새들러의 저술을 차용한 칼럼으로 이어가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일독해보길 권하는데, 필자와는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조화:
진지한 성찰 vs 과감한 실행

다섯 번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새들러는 중국 여성 린 교수의 사연을 전하고 있다. 린 교수는 인생의 전성기 무렵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인생의 좌절을 겪었다. 러시아어 석사과정까지 마친 전문가였지만 학자와 지식인들이 숙청되고 책을 읽는 것조차 범죄가 되는 문화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문화혁명 이후 러시아어 교수로 자리를 잡았지만, 학문적 성과를 거두기에는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나 중년기가 지나 교환교수 활동으로 중국을 벗어나 많은 자유를 얻게 되자 진지한 성찰을 통해 56세의 나이에 새롭게 변신했다. 변신에 앞서 린 교수는 “쇠퇴의 과정에 적응해가는 중년 여성의 관점을 가질 것인가?”, “회춘을 경험하고 있는 사려 깊고 활기찬 여성의 관점을 가질 것인가?”를 놓고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자기 내면의 창조력에 귀를 기울인 끝에 나이에 대한 관습적인 표상, 즉 사회적, 문화적 기준들을 거부하는 ‘과감한 실행’에 나섰고 미국에서 미국인들에게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가르치는 지도자가 된다.

사실 이런 스토리는 너무 뻔하게 보여진다. 인생 전반을 살펴보면 매우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것인데 글로 쓰고 보면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아서다. 특히 번역된 언어로 상황을 마주치게 되면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좀 더 상상력을 동원하면 린 교수야 말로 좋은 사례가 되어 준다.
말로만 혁명이지, 문화혁명은 중국 사회의 퇴보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문화혁명이 오히려 엄격한 감시와 통제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통제된 청장년기를 보낸 사람, 특히 사회적으로 좀 더 제약을 받는 여성이라는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는 고정관념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린 교수의 변신은 큰 의미를 갖는다.니

내면적으로는 더욱 치열하게 사는 인생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것은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을 부수고 새롭게 기초를 판 다음 건물을 신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춘기는 몸 속의 성장호르몬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2차 성장기는 내면적인 성찰, 내적 동력이 커지기 전에는 변할 수가 없다. 바꿔말해 사춘기 청소년의 반항이나 감정기복 못지않게 내면의 갈등 또한 치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새들러는 ‘진지한 성찰’에 이어지는 ‘과감한 실행’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새들러는 저서 ‘서드에이지’에서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에겐 진지한 성찰 이후 과감한 실행이 이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과감한 실행을 하기엔 무모하게 여겨지기에 진지한 성찰을 더 하는 것이고, 진지한 성찰만 해서는 나 자신도 세상도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과감한 실행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 2가지 요소는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새들러가 말하고 싶었던 본질은 “자신을 속박하는 문화적 규범을 깨뜨리고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조화:
개인의 자유 vs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

새들러는 “대중매체는 중년의 해방을 중년의 위기와 혼동하게 한다”면서 “위기는 중년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갱년기, 권태기와 함께 중년에 대해 만들어진 통념이란 것이다. 또 “‘개인의 자유는 인간관계, 공동체를 희생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암시’라는 자유에 대한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중년의 자유를 잘못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들러는 “성인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타인과의 친밀한 유대감이 깊어지는 만큼 개인의 자유도 신장하는 것을 보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는 서로 상반되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자유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마음 깊이 믿는 대로 행동하도록 스스로 허락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한다. 새들러는 왜 자유를 강조하는 걸까? 그것은 더 깊은 나눔을 위해서다. 생애주기 상 서드에이지에 이르면 결혼과 출산을 통해 가족이란 공동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어서다.

이에 대해 새들러는 ‘새로운 종류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결혼 초기에 ‘우리’라는 개념밖에 없었다면, 중년기에는 ‘우리 두 사람’이라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면서 “배우자의 요구와 결혼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는 결혼생활”, “친구같은 결혼”으로 재정의해야한다고 말한다. 이어 “배우자가 모든 중요한 국면에서 동등함을 가짐으로 인해 자기계발, 타인과의 친밀함 등에서 헌신과 균형을 이루는 관계의 통합된 양상에 도달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결혼생활

필자가 보아도 생애주기로만 본다면 서드에이지에 도달하는 세대는 이미 사춘기에 접어드는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 사춘기 자녀에게 부모의 역할은 먹고 잠드는 생존을 도와주는 존재가 아닌 정서의 영역에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자녀와 붙어있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 보면 부모의 역할에서 다시 부부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들러의 지적은 매우 절묘한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매우 애매한 부부관계를 보게 된다. 상대적으로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부부들이 많다. 특히 휴직, 이직, 창업창직과 같은 진로의 결정이나 재정적 결정에 있어 충분한 의사소통을 거쳐 함께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동반자 이상의 결혼생활은 서드에이지의 2차성장을 강화해주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돕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는 친구 사이의 우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사랑과 우정의 질을 높임으로서 더욱 조화로운 성장을 이루게 된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윌리엄 새들러의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라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2차 성장을 위한 여섯 가지 원칙을 3회에 걸쳐 정리해 보았다. 이 여섯 가지 원칙들은 삶 속에서 이분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요소들 가운데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숨어있는 듯하지만, 막상 완독하고 나면 삶 속에서 체득하게 되는 지식과 교양 수준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앎이 있다 하더라도 삶의 실천을 이루지 못한다면 아무런 변화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새들러의 저서는 실천의 기준점을 명확히 해주고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근거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힘을 보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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