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김병건 기자] 어둡고 힘들었던 일제 강점기. 시인 이육사는 그의 시 ‘절정’의 마지막 구절을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끝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정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대학이나 맹자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행위’가 정치의 본질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현대 정치학에서 정의하는 정치의 본질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에 대해 조정과 합의하는 과정을 정치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갈등의 조정은 선출직 고위공무원과 비선출직 관료가 결정하게 됩니다. ‘촛불시민’의 민의가 반영되기는 하지만 보통 그 순간일 뿐이었습니다. MB시절 광우병 촛불집회는 지금 박근혜 퇴진의 촛불만큼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촛불집회’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일까요.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 금지되었나요. 아니면 수입 통관제도가 항구적으로 안전성을 확인받았나요.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결과는 촛불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도로교통법위반’이라는 벌금통지서 뿐이었습니다.

밀양 송전탑은 고령의 할머니들은 국가의 공권력에 들려나가고 심지어 공권력에 의해 연행되는 과정에서 한 여성 활동가는 속옷이 노출되는 인권모욕을 당했습니다. 

제주 강정마을은 어떤가요. 정당했던 주민들의 요구에 대해 ‘업무방해’라고 구속과 벌금, 사회봉사, 보호관찰 등 온갖 사법적 불이익을 주고 해군은 구상금 청구까지 했습니다.

제주도 작은 마을을 상대로 한 어마어마한 구상금은 지역 주민들을 갈라 세우고 결국 마을 공동체를 해산 시켜버렸습니다. 

그런데 전직 군 장성의 수십억원의 방산비리에 대해서는 ‘생계형 비리’라는 미명 하에 한없이 관대했던 이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촛불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기득권은 아직은 건재한 것 같습니다.

민의

박근혜 퇴진 촛불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만으로 끝나면 되는 것일까요. 새누리당이 분당되어 국회는 5당 체제가 되었습니다. 쉬운 말로 새누리가 아무리 반대해도 야3당이 공조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회자되던 ‘국회 선진화법’은 무력화됩니다. 

다음 정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처리 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고 악법들을 개정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당, 국민의당이 추진하는 5개 개혁과제 22개 개혁법안을 '선'이라는 이름과 '악'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고 대비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둘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면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태는 훨씬 복잡해지고 각종 논리와 반논리가 충돌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선거연령을 낮추는 하나의 문제만 남아있고 나머지 22개, 소위 개혁입법안은 지켜봐야겠지만 기실 낙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가 민의를 담아 정치를 하는 구조라고 하지만 이제는 민의를 정확히 규정하기도, 선거를 통해 온전히 담아내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브렉시트에서도 드러났듯이 민주주의 가치와 민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고, 클린턴은 트럼프보다 4%이상 득표 했지만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이러한 민의의 왜곡은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헌법 개정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베 총리는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연립여당이 중의원과 참의원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개헌을 하지 못하고 상황만을 보던 아베 총리는 얼마 전 ‘국회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개헌이다’라고 밝히면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많은 정치평론가나 외교가에서는 이제 일본의 개헌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는 위기와 도전을 받는 추세입니다.

절정

보수·수구 집권 10년 동안 문화예술인에 대한 블랙리스트는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문화제의 사회를 보았다고 방송금지를 당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정부를 비판했다고 하차하고, 공영방송 출연금지 명단에 올랐던 MB시대는 생각해보면 차라리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합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수많은 블랙리스트의 실상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하다 못해 SF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문화예술은 기본적으로 사회 비판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그 사회를 비판하고, 그 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예술의 시작입니다. 

과거 박성광이라는 희극인은 자신의 프로그램 책임PD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주변 희극인들이 만류했지만 박성광씨는 책임PD를 끝까지 풍자하고 조롱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박성광씨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대리 충족시켜 준 것입니다. 이것이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세월호와 관련된 영화 상영을 추진한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여버리고, 야당 유력 정치인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하고, 세월호 추모 집회 현장에 참석했다고 지원을 거부한 이런 정권에서 외친 ‘문화 융성’이라는 정책이라는 것이 진정 궁금해집니다.

저는 상상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사람들이나 극우주의자들의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오로지 북한식으로 최고 권력자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탈춤은 우리 문화의 중요한 서민 문화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우리사회는 비록 탈이라는 가면을 통해서 기득권 양반사회, 부패한 관료, 요망한 승려들을 비판하고 조롱하고 희화화 했습니다. 

탈춤에 대해서 양반도, 지역 관료도 그 내용을 가지고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탈춤의 내용 중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비판은 당시의 집권층이 국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는 기록은 많이 있습니다.

과거 5.18 광주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는 이유로 세계 3대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에게 축전을 보내는 것조차 거부해버린 정권. 해외문학 단체에서 한국인 작가를 초정했지만 그 작가들이 과거 세월호에 대한 내용의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보수적인 소설가를 추천했지만 해외 단체에서 거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제는 정말 ‘막장’에 다다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배신감, 단단한 기득권세력, 도전받고 있는 민주주의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있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어야 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통제는 우리의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국정을 농단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나아가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국가의 정신과 문화를 침탈(侵奪)하고 자신들만의 문화로만 병탄(倂呑)하려는 지난 10년간의 보수 정권을 보면서 이육사의 ‘절정’을 눈으로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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