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살리고 싶었다”


 

▲ DJ가 서거하자 박지원 의원이 의료진들과 함께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임종을 알렸다. 사진에서 가장 왼쪽이 정남식 교수.

 
 
 
 
 
 
 
 
 
 
 
 
지난 18일 오후 1시43분. 정남식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사망선고를 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이희호 여사는 오열했고, DJ의 3남은 ‘아버지’를 부르짖었다. 정 교수 역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DJ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8년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DJ의 주치의로 지내온 12년 동안 지난 37일간이 정 교수에겐 가장 힘든 시기로 기억될 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였던 것은 DJ였지만 이를 매번 지켜보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던 것은 바로 정 교수였다. 그가 고백하는 DJ의 투병기와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다.


1998년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좌
노무현 서거 충격 탓 “폐렴만 아니었다면 더 오래 사셨을 것”


DJ가 대통령직에 물러난 이후에도 정남식 교수는 DJ의 주치의로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3년부터 매주 세 차례 DJ의 혈액투석을 도우며 건강을 계속 돌봐왔던 것. 그는 “80대 이상의 고령 환자가 신장 투석을 받을 경우 5년 간 생존율이 20%가 안 되는데, DJ는 6년 반 째 투석을 받고 있다”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있은 후 DJ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고비가 된 것은 지난 5월28일이었다. DJ가 휠체어를 탄 채 서울역광장의 분향소에서 차례를 기다려 조문을 하고 연설을 한 것. 이날 이후부터 DJ는 시름시름 앓았다.

13명 전담팀 24시간 대기

정 교수가 동교동으로부터 DJ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달 13일. DJ를 찾아간 정 교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DJ가 평소보다 훨씬 기운이 없었고, 아픈 증상에 대해서도 설명조차 하기 힘들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정 교수는 즉시 DJ를 입원시킨 뒤 전 의료진을 불러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후 정 교수는 장준 호흡기내과 교수, 최규헌 신장내과 교수를 비롯해 의사, 간호사 등 13명으로 구성된 전담팀을 이끌며 24시간 DJ를 돌봤다. 최신 의료기기를 항시 대기시켰고, 진료 차트를 하루에도 열 번 이상씩 되짚었다.
워낙 고령의 나이였던 터라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정 교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2005년 8월에도 같은 폐렴증세로 입원한 DJ가 엄청난 약물을 투입했는 데도 불구하고 견뎌낼 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DJ의 심혈관질환 치료를 담당했던 정 교수도 “내가 의사로서 겪어본 수많은 환자 중에 그런 사람은 DJ가 처음”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지난 12년 동안 DJ의 심장 치료를 전담해 온 결과 그의 심장은 매우 튼튼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DJ는 의사가 먹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안 먹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않는, 의사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따라준 참 고마운 환자였다”면서 “평소 의사 말을 잘 따라 이번에 폐렴만 아니었다면 더 오래 사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DJ의 서거 후 “공허하고 아쉽다”는 정 교수는 아직도 DJ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폐렴으로 입원했으나 지난달 23일 폐색전증이 나타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DJ와의 유일한 대화수단은 눈빛이었다.

37일간 ‘눈빛’으로 대화

DJ가 입원해있던 37일간 정 교수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DJ의 눈빛을 보며 건강상태를 확인, 그의 심경을 읽었다. “눈을 마주칠 때 항상 고마운 눈빛으로 바라보셨다”는 정 교수는 앞서 지난달 19일 인공호흡기를 잠시 땠을 당시 DJ가 가늘고 떨리는 음성으로 “고맙습니다”라며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전했을 땐 눈물마저 핑 돌았다. 그래서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웠다”는 게 정 교수의 고백이다. 그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이젠 편히 쉬셨으면 하는 게 간절한 바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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