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충주 탄금대와 133년 만에 살아난 무예노리
신립의 죽창은 꺾였지만, 백성의 피리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세상이 공평하면 대나무는 피리가 되고, 불의하면 죽창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충주는 그 두 세계가 교차하는 땅이다. 우륵의 가야금과 신립의 배수진이 맞닿아 있는 자리, 탄금대가 바로 그 중심이다. 충주 사람들은 과연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보낸 날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죽창을 들고 난세를 견뎌야 했던 날이 더 많았을까.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주를 "두 얼굴의 고을"로 기록했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굽이치며 청천·괴강·달천을 이루고, 다시 청풍강으로 이어지니 경관이 빼어나고, 한강 상류수로 덕에 한양 사대부들이 즐겨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매운 문장으로 충주의 속살을 드러냈다.
"경상 좌도는 죽령을, 우도는 조령을 넘어 한양과 통하니 두 고개가 모두 충주에서 만난다. 수로와 육로가 겹치니 요충지라 난리만 나면 싸움터가 된다. 살기가 하늘을 찌르고 태양도 빛을 잃는다." 그의 기록엔 탄금대 전투에서 8천 장병이 몰살당한 비극이 200년이 지나도 걷히지 않은 충주의 기억이 서려 있다.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택한 이유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여진 정벌에서 맹활약한 기마전의 명장 신립은 자신감에 갇혀 있었을 수도 있고, 진흙탕에 빠진 말의 기동력 상실이 패착을 불렀을 수도 있다. 제승방략 체제 아래 낯선 병력과 호흡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 '죽기로 싸우는 전투'가 오히려 합리적 선택이라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탄금대 전투는 조선이 국가의 전력을 걸고 벌인 첫 대규모 결전이었다. 신립이 패하자, 왕은 서울을 등지고 도주했고, 백성들은 '신립이 있는데 어찌 패하랴'라고 믿었던 터라 피난도 늦었다. 충주는 왜군의 발길 아래 처참히 짓밟혔고, 충청감영은 공주로 옮겨야 했다. 전쟁은 언제나 판단보다 시간이 앞서는 법이다. 신립의 패배는 전략의 실패가 아니라, 혼란한 시대가 한 명의 장수에게 짊어지게 한 과도한 짐이었다.
숙종은 강화도를 비롯한 주요 군진을 정비하며 전란 이후 무너진 국방 체계를 다시 세운 왕이었다. 국가가 혼란을 수습하고 방비를 재정비하던 바로 그 시기, 그의 재위 39년(1713) 충주에서는 새로운 '무예노리' 전통이 태어났다. 전란의 상흔을 씻고, 가토 기요마사를 상징적으로 응징하며, 백성의 한을 축제로 승화하던 생활 속 무예 문화였다.
그러나 이 전통은 고종 30년(1893), 일제의 침략기로 접어들며 맥이 끊겼다. 133년 동안 잊혔지만, 그날 신립의 죽창은 꺾였어도 백성의 피리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무예노리의 장단이 다시 울리는 날, 대나무는 다시 죽창이 아닌 '피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과거를 극복하는 가장 온전한 방식이다.
충주는 이미 택견의 세계화를 위해 세계 무술 공원을 조성하고, 1998년부터 세계대회를 이어오고 있다. 무학당과 택견협회가 힘을 모아 한국 무예의 역사와 전통을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가꾸어간다면, 지역 활성화는 물론 충주의 정체성을 밝히는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가까운 나라와 우호를 다지는 일은 필요하지만, 기억을 잃은 우호는 공허하다. 대나무가 다시 피리로 울릴 때, 우리는 비로소 승리한다.
덧붙임- 필자는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의 충주 취재를 133년 만의 무예노리 부활 소식에 맞춰 앞당겨 진행했다.
<Who is>
이병록 국민주권전국회의 공동대표
정치학 박사
예비역 해군제독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