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록의 책을 통해 세상 읽기, 유영수의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착각』
외형 너머, 시스템에 갇힌 일본
선진국이라는 신화에 던진 질문
유영수는 묻는다. 일본은 정말 선진국인가? 아니, 우리가 말하는 '선진국'은 무엇인가?
한때 세계 경제 2위를 자랑하며 '모범 자본주의 국가'로 불리던 일본은 이제 그 찬란한 외피 아래 낡은 시스템과 미완의 민주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기술과 질서의 표면 아래에는 불합리한 사법 체계, 시대착오적 성 역할 규범, 폐쇄적 행정 권력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겉모습만 보면 일본은 안정적이고 세련된 선진국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아직도 변화하지 못한 제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99.9% 유죄 국가, 사법제도의 민낯
일본은 '99.9% 유죄 국가'로 불린다. 2022년 기준 유죄율은 99.4%에 달한다. 구속영장 기각률은 극히 낮고, 검찰이 기소한 사건은 거의 예외 없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피의자의 방어권이 거의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의자 심문에 변호사 입회가 허용되지 않고, 장기 구금과 강압적 자백이 여전히 수사 관행으로 남아 있다. 닛산 전 회장 카를로스 곤은 자신이 겪은 장기 구금 경험을 "인질 사법"이라 불렀고, 해외 도피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전 세계의 시선을 모았다.
일본 사법 통계
유죄율: 99.4%
위헌 결정: 74년간 20건
한국 헌법재판소 결정: 1988~2020년 917건
검찰 권력은 사실상 견제받지 않는다. 수사기관과 법원 사이의 권력 분립이 작동하지 않고, '사회방위'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이 희생된다. 과거 특수부의 정치권 수사는 검찰 개혁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엘리트주의와 폐쇄성만 남았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이 언젠가 흉기가 된다는 경고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이 없는 나라
헌법재판 제도는 일본 사법 시스템의 보수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독립된 헌법재판소가 없고, 최고재판소가 헌법 판단을 대신한다. 그러나 1947년 헌법 시행 이후 2020년까지 위헌 결정은 고작 20건뿐이다. 같은 기간 한국 헌법재판소는 917건(위헌 655, 헌법불합치 262)의 결정을 내렸다.
연합국 점령기에도 일본 사법부는 큰 인적 쇄신 없이 존속했다. 1946년 일본 사법계가 연합국 최고사령부에 제출한 헌법 개정 요강에는 "사법권은 천황의 이름으로 헌법에 따라 재판소가 행한다"라는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새 헌법은 제정되었으나, 결국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은' 셈이 되었고, 전후 일본 사법부는 체제의 안정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에 머물렀다.
멈춘 성평등, 조용한 미투
2017년 이후 전 세계로 확산한 미투 운동이 일본에서는 좀처럼 확산하지 못했다. 피해자가 나서면 사회적 지지보다 방조나 비난이 먼저 돌아왔다. 일본 우익 세력은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를 모두 '국가를 파괴하는 해악'으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은 법과 제도 속에 깊이 박혀 있다. 2020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부부는 반드시 같은 성을 써야 한다'는 규정을 합헌이라 판결했다. 이혼 후 재혼 금지 기간도 2015년에야 100일로 단축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은 이미 2005년에 이를 폐지했다.
경제 제도 속의 보이지 않는 장벽
여성의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제도도 여전하다. 대표적인 것이 '103만 엔 벽'이다. 주부가 연 소득 103만 엔 이하일 경우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여성들이 정규직 취업 대신 시간제 일자리와 소득 조절을 택하게 만든다.
이는 저출산·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는 일본 사회에서 구조적 모순으로 작용한다. 여성이 일할 기회를 더 얻어야 국가 전체가 살아날 수 있지만, 제도가 오히려 그 길을 막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
일본은 산업 기반, 기술, 사회 질서 면에서 분명 선진국의 외형을 갖추었다. 도시의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기업들은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이란 GDP나 기업 이미지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와 성평등이 함께 성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술 강국'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선진국'은 아니다. 일본은 지금 그 한계를 우리 앞에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거울 앞의 한국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일본은 변화를 거부하고, 낡은 시스템 속에서 정체되어 있지만, 한국은 과연 다른 길을 걷고 있는가?
최근 한국 사법부의 행태와 정치권의 퇴행적 모습을 보면,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거울 삼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다.
<Who is>
이병록 국민주권전국회의 공동대표
정치학 박사
예비역 해군제독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