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층. 김대중아카데미 김성재(전 문화관광부 장관)원장이 환하고 웃고 있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하며 김대중 정신을 계승·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거 전까지도 '민주주의 위기' '서민의 삶' 걱정...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정신 계승 역할 다할 것"

[민주신문=강신복 편집위원] 지난 8월 13일 국립현충원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묘역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전 11시 30분에 치러지는 김대중 대통령 동경납치 생환 41주년을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30분, 묘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 특히 묘역 입구 비석에 단체로 온 참배객들이 빙 둘러서서 비석에 쓰여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어록을 보고 있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라고 오목새김으로 쓰여 진 비석 글을 보는 참배객들의 모습은 숙연해 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몸이 불편한 참배객을 위해 묘역입구까지 계단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지그재그 오솔길로 만들어졌고 통로에는 커다란 붉은 홍송(紅松)이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김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하여 아들 홍업·홍걸 씨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 한화갑 전 민주당 당 대표, 한승헌 전 감사원장, 남궁 진 전 장관, 박지원(전 민주당 원내대표), 박주선, 김영환, 정청래, 박광온, 박양수, 김방림, 이훈평, 배기운, 윤철상, 김희철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박 승 전 한국은행 총재도 참석을 했다. 80여 평의 묘역에는 '국민의 정부'에서 함께 했던 인사들을 포함해 100명 넘게 참석했다.
추모 기도를 집전한 이해동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이 생환하신 지 41주년이 됐다. 감사와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이희호 여사는 "최근 감기 기운이 있어 2∼3주 동안 요양을 한 뒤 건강을 회복해 행사에 참석했다"고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가 전했다.
한편 필자는 자리를 옮겨 권노갑 상임고문이 마련한 오찬장소로 이동, 점심식사를 한 후 오는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이하여 이희호 여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동교동 사저를 찾았다. 먼저 이 여사를 모시고 있는 김대중평화센터 윤철구 사무총장을 만나 인터뷰를 요청 했지만 윤 사무총장은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요즘 일체의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필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이하여 꼭 인터뷰를 원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여사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김성재 전 장관님과 인터뷰를 주선해 주겠다"며 그 자리에서 김 장관에게 전화를 했고 다음날 오후 2시에 인터뷰 약속을 받고서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오는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한 지 만 5년이 되는 날이다. 특히 올해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기 추모위원회'에 위원장으로 정의화 국회의장이 맡아 남다른 추모 열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고 필자 역시 추모하는 마음으로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을 찾았다.
입추가 지나고 내리는 빗방울은 가을을 재촉하는 듯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2시 정각에 도착한 필자는 곧바로 김대중도서관 4층으로 향했다. 4층에 도착한 필자는 윤철구 사무총장의 안내로 김대중아카데미 김성재 원장(66·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났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석좌교수직을 겸임하고 있는 김 원장의 사무실은 의외로 작고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소파 위로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분의 사진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2000년 6월 정상회담 시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 왔다. 반가운 사진이 아닐 수 없다. 그때의 그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1969년 DJ와의 첫 인연
  
김성재 원장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50여 년 만에 이뤄진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5대)을 지냈으며 45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지속하고 있는 보기 드문 측근이자 학자, 언론인이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장,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석좌교수,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상임대표, 아시아태평양민주지도자의회 이사장, 사랑의 친구들 회장, 문화관광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한신대학교 교수평의회 회장 등 다양한 경력과 이력은 김 원장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보람된 삶의 증거일 것이다.
 필자가 인터뷰 도중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무려 4번하고 반이 변한 45년 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직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하고 지근거리에서 모셨다는 점이다. 최측근 중 측근이라 아니 말 수 없다. 김 원장은 우선 나이보다 10년 넘게 젊게 보였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하여 한 점 후회 없는 삶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필자가 "10년은 젊게 보인다"고 하자 김 원장은 "허허"하며 천진한 웃음을 내 보였다.
필자가 궁금한 마음으로 김 원장에게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묻자 거침없이 "지난 1969년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위원장으로 한신대 명예학장 김재준 목사께서 맡아 이끌었다. 그 위원회에 당시 신민당 김대중 국회의원이 참여하였고 나는 대학생 3학년대표를 맡아 김재준 목사님을 도와드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했다.
김 원장은 이어 "그리고 지난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막기, 표지키기를 위한 참관인으로 故 김근태 국회의원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대학시절부터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은 물론 정당과 통일연구 활동을 도왔으며 당시의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 등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이력이 아닐 수 없다. 패기만만한 20대 초반부터 정년 나이를 훌쩍 넘어 60대 후반인 지금까지 능력을 인정받아 그 인연을 계속 이어온 셈이다.

 

▲ 김대중도서관 전시실 내 '철의 실크로드', 경의선, 경원선 철도 연결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김성재 원장

“정책 하나하나에도 인간중심 철학 녹아 있었다” 

 필자가 이번에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추모위원회 위원장으로 정의화 국회의장께서 맡았는데 그 배경에 대해 묻자 "정의화 국회의장님은 일찍부터 동서화합에 노력하신 분이고 아울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고문을 맡아 평소에도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였고 이번 추모위원회에 위원장으로 모셨으면 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 의견을 모아 정의화 국회의장님께 전달하자 고맙게도 흔쾌히 수락을 해 주셨다"며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평생을 동서화합, 국민화합을 위해 노력하셨고 희망하셨기 때문에 정의화 국회의장의 위원장 수락은 많은 의미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일평생 뜻이기도 한 동서화합, 남북교류 화해협력, 평화통일의 뜻을 상징하기도 해 그 의미가 매우 크고 남북관계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필자가 "김대중 대통령님을 45년간 모신 원장님께서 국민들이 모르는 재미나는 일화 같은 것은 없느냐"는 질문에 김 원장은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시기 1년 전부터 민주주의 위기, 남북경색 국면, 중소서민 경제위기를 매우 안타까워하시면서 매일 밤에 주무시기 전에 손을 잡고 눈물로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고 돌아가시기 2개월 전인 2009년 6월에 건강이 좋지 않아 의사들이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남북 정상회담 9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민주주의 회복과 남북관계 개선 그리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노력할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역설했던 기억이 난다. 나라 현실, 정치가 오죽했으면 대통령께서 담벼락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라고 했겠느냐"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김 원장은 이어 "대통령께서는 특히 돈 없는 서민,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 게 사실이라며 세계가 극찬한 생산적 복지확충, 최소 생계비 보장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을 제정한 이유도 다 국민을 위한 것이고 입법하나, 정책 하나하나에도 인간중심으로 정책을 강구한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울러 김 원장은 "정치인의 역할,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라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김대중정신'이요 대통령의 통치철학이었다"고 강조했다.

"사인여천(事人如天)  DJ 정신 계승 역할 다할 것"  

 

 1969년 대학교 3학년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첫 인연을 맺은 후 45년간 한결같이 DJ 곁을 지켜온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

필자가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 계획에 대해 묻자 "김대중아카데미는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정신'을 이어가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숭고한 뜻을 알리는데 역할을 다할 것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아직도 김대중 사상과 정치철학, 훌륭한 정책을 모르기 때문에 젊은 정치인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저술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김대중 정경의숙'역할을 해 나가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필자가 근면성실함이 몸에 밴 김 원장의 좌우명이 궁금하여 물었는데 공교롭게도 김대중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쓴 휘호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일맥상통한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해서 놀라웠다.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좌우명이 몸에 밴 듯 하여 그것이야말로 김 원장이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45년간 인정받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했다.        
 인터뷰 말미에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이하여 1층 전시실로 자리를 옮겨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시간을 갖자"고 하자 김 원장 역시 "좋다"며 1층 전시실로 함께 내려갔고 도서관 로비 중앙에 자리한 작은 책꽂이에 필자가 지난 2000년에 지은 《김대중대통령의 어제,오늘》(글힘출판사, 592쪽) 책자를 보여주며 "제가 쓴 책이라"고 말하며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실 때 이 책이 KBS, MBC 저녁 9시 뉴스에 메인으로 소개된 책이라"고 말하자 김 원장은 웃으면서 "알고 있다"고 화답을 해 주었고 곧바로 우측 입구부터 전시실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맨 입구 좌측에 '동교동 옛 사저 재현'을 시작으로 '꿈 많던 소년'(우측), '목포에서의 활동', '언론인으로서의 김대중', '본격적인 정치활동 시작', '1959년 총선 출마, 거듭 낙선, 61년 5월 13일 실시된 총선에서 당선, 3선4기 신화', '야당 정책이론가로서 활동', '야당 중심인물', 우측으로 돌아 '1971년 7대 대선 출마' '선거포스터' '10년세도 썩은정치,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눈에 띄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당시 획기적인 정책 대안을 발표하여 박정희 정부를 놀라게 했다. '4대국 안전보장론' '3단계 통일론' 등의 정책대안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1차 망명(1972.10.17)', '김대중납치사건(1973.8.8∼13)',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3.1민주구국 선언'은 대표적인 민주인사들이 연합해서 유신체제를 비판한 역사적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2년 10개월 옥고를 치렀다. '사형선고'(80년 내란음모사건, 2년 10개월 옥고), '김대중과 5·18 민중 항쟁', '폭풍을 몰고 온 귀국', 85년 귀국하여 신민당 제1야당 구축 등과 함께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그간 활동한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민주화 운동의 동지', '여성운동가 이희호', '결혼과 삶의 동반자', '영부인 이희호' 전시물  앞에 '대통령되어보기' '청와대 집무실 재현' 등을 눈여겨봤고 필자와 김 원장이 마지막 전시실에 발걸음을 멈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철의 실크로드' 경의선, 경원선 남북철도 연결 부분에서 감회가 새로운 듯 김 원장은 "이 지도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평생소원인 남북한 민족 평화통일 목포에서, 부산에서 이 철도를 이용해  북한을 거쳐 중국, 몽골, 러시아, 유럽까지 갈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답답하다"며 "만약  김대중 대통령님처럼 대북정책을 실행한다면 중국에 붙어 있는 반도국가가 아니라 세계적인 중심축 역할을 하는 세계적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겠다는 김 원장의 다짐을 보는 듯 했다.
필자가 "이 나라 민주주의, 인권, 평화통일, 지방자치, 서민경제, 약자보호, 복지시대를 연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명한 업적"이라고 말하자 김 원장은 "IT 강국, 월드컵 4강 신화, 남북정상회담, '6·15선언', 노벨평화상을 수상,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남북화해 협력의 시대를 연 그 공로는 전 세계가 다 인정하는 것이다"고 화답했다. 

▲ 2014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14주년 학술대회 기념식 행사장에서 연설하는 이희호 여사

인터뷰를 마치고 로비를 나오는 순간 갑자기 이희호 여사의 하루일과가 궁금하여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김 원장에게서 나왔다. "여사님은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북한 어린이들이 굶고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돕고 싶어서 '사랑의 친구' 명예회장으로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털모자, 의약품 보내기에 힘쓰고 있으며 작년과 재작년에 털모자 5000개씩을 보냈고 손이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털모자를 손 뜨개질을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문득 도서관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서 이희호 여사께서 국장기간에 김대중 전 대통령 영전에 남긴 편지가 쓰여 진 액자가 생각나서 여기에 적어 놓는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애써준 것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사랑스럽습니다.』(2009년 8월 20일)

▲지난 8월 13일 국립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동경납치 생환 41주년 기념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는 이희호 여사.

이에 화답하듯 부군이신 김 전 대통령께서 저서《내가 사랑한 여성》에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바로 아내와의 헤어짐이 너무도 아쉽고 슬프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평소 아내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던 것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부부애를 볼 수 있다. 참고로 인터뷰에 응한 김성재 김대중아카데미 원장은 김미순(62)여사와 1남1녀를 두었으며 출가한 아들 동진 씨는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로 딸 은선 씨는 오페라 지휘자로 아버지 명성에 걸맞게 맡은 바 직분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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