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을 암살하라”


 

# 핵실험 후 잠적… 암살위협설, 와병설, 중국방문설 제기
# 핵실험 뒤 미국 등의 암살 피해 잠적했다는 설도 나와

북한의 핵실험 성공 선언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또 다시 행방을 감췄다. 핵실험 당일 날인 노동당 창건 61주년 기념식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포동 미사일 발사 후에도 40여일간 잠적했다 나타났다. 국내외 안팎에서는 김 위원장의 은둔을 두고 갖가지 설이 난무한 실정이다.

지난 7월 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 달 반을 잠적했다. 당시 그는 공개적인 행사에는 일절 나타나지 않았고, 북한 관련 국내외 전문가들의 정보망에도 포착되지 않아 행적을 두고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잠적을 두고 책임회피설과 와병설을 제기했었다.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는 실패로 끝나 주변국들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 채 소리만 요란했다. 북한이 대외적으로 망신살을 뻗치게 되자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한 책임론을 피하기 위해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책임회피설이다.

와병설도 불거져 나왔다. 김 위원장은 과거부터 심장병 치료를 받아왔으며, 지난 4월에는 당뇨와 신장이 안 좋아졌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그는 8월 중순 모습을 드러내며 군부대를 시찰하는 등 건재한 모습을 과시, 각종 추측들을 잠재웠다.

이번 핵실험 이후 김 위원장은 또 행방을 감췄다. 핵실험이 실시되기 사흘전인 지난 6일 그는 인민군 고위 간부들을 대동하고 대대급 지휘관들을 격려했다고 북한 노동신문이 전했다. 공개적으로 군 지휘관들을 격려한 것이다. 그리고 핵실험 실시 발표 이후부터는 노동당 창건 61주년 기념식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등 잠적에 들어갔다. 북한의 언론들도 노동당 창건 기념식은 보도했지만 김 위원장의 동정 등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의 잠적을 두고 국내외에서는 갖가지 추측을 내놓고 있다. 그 중 암살을 피하기 위한 은둔설과 와병설, 중국방문설이 북한에 정통한 소식통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지난 달 29일 연합뉴스 영문판은 국내 정보통의 말을 인용해 “김정일 위원장이 자신의 외모, 키가 비슷한 사람 2명 이상을 고용해 외부행사에 내보내고 있다. 최근 북한 언론에 비친 김 위원장은 대역이다”고 보도했다. 이어 영국의 텔레그라프는 “김 위원장은 대역에게 성형수술까지 시켜 완벽히 자신의 외모를 빼닮게 했고, 행동 스타일도 훈련시켰다”며 “이처럼 대역을 쓰는 이유는 암살을 피하기 위한 점도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점도 고려됐다”고 전했다. 과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도 대역을 쓴 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김 위원장이 대역을 쓴다는 남한과 외신들의 보도는 사실무근이다. 터무니없는 모략보도다”라고 일축했다.
김 위원장의 은둔에 대해 와병설도 북한 정보통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과거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최근에는 당뇨와 그 합병증까지 겹쳤다는 것이다. 이에 김 위원장은 어딘가에 은둔해 병치료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난 달 제기됐었던 중국방문설도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방중설은 그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중국이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데다 북한 역시 ‘더 이상 중국에만 기대지 않겠다’는 의중을 내비쳐 이런 상황에서의 방중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 김 위원장 은둔과 관련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어떤 징후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북한 관련 전문가들은 “미사일 발사 후 은둔 때처럼 조만간 김 위원장이 건재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겠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이번에도 모습을 감춘 그는 유엔 안보리 및 주변국들의 움직임 등을 지켜보며 다음 수순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욱 기자 ottawa1999@hanmail.net



- 도상록 교수가 핵실험 기초 마련

북한이 핵실험을 할 수 있게 토대를 마련한 한 월북과학자가 있다. 해방 직후 서울대 교수로 있다가 1946년 5월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도상록 교수다.
북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도 교수는 원자력 이론서 30여 권을 집필하고 핵가속 장치를 개발해 김일성대학에 설치하는 등 북한 핵개발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배려는 각별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 당시 도 교수를 당대회 대표(대의원에 해당)로 임명했다. 83년에는 ‘인민과학자’ 칭호와 김정일 명의의 표창장까지 주면서 격려했다.

도 교수가 노환으로 교단에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자 김정일은 대학교수직을 유지한 채 자택에서 핵 관련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조치했다. 1903년생인 도 교수는 90년 87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또 조선혁명박물관에 도상록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의 업적을 기리도록 했다.

북한 탈출 뒤 남한으로 온 한 고위인사는 “도상록이 닦아놓은 이론적.기술적 토대가 없었다면 북한의 핵개발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일성 전 주석도 생전 도 교수에게 ‘원사’ 칭호를 주고 ‘김일성훈장’을 수여하는 등 각별히 챙겼다고 한다. 북한에서 원사란 과학분야 발전에 공헌한 원로 학자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 칭호다. 북한 신문들은 김일성 주석이 수 차례나 김일성대학을 찾아가 그를 격려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함경남도 함흥 출생인 도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졸업 뒤 개성 송도중학교 교원 시절에는 ‘헬륨수소 분자의 양자역학적 취급’과 ‘수소 가스의 양자역학적 이론’이란 논문 두 편을 미국 학술지에 발표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어 중국 창춘(長春)공업대학과 서울대에서 근무했다. 월북 뒤에도 그는 핵물리학 분야 등에서 14개의 새로운 과목을 개척하고 4만 쪽에 가까운 교재를 직접 집필하는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했다.

정부 당국자는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도 교수를 각별하게 대우했던 것은 그만큼 핵개발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욱>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