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자의 슬픔...대한민국을 적시다!

 

▲ 한 조문객이 세월호 침몰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글을 읽고 있다.

[민주신문=강신복 편집위원]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 볼 때 마다 충격을 받는다. 『구조 174명, 사망 205명, 실종 97명, “꼴도 보기 싫은 정부”… 돌려세워진 대통령의 조화, 성난 민심에… (국무회의 석상) 13일만의 사과’』지난 4월 30일 아침 한 조간신문 1면기사다. 세월호 침몰 기사를 볼 때 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온나라가 통곡하였고 슬픔에 잠겼다. 세상에 어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믿기지 않은 인재가 일어났다. 경악과 분노를 넘어 망연자실(茫然自失)했고 두려워 어찌 할 바 모를 공황에 빠졌다.
17살 어리고 여린 꽃망울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엽고 사랑스런 자식들이 입시지옥에서 잠시 벗어나는 즐거운 수학여행 길에 까르르 웃고 장난치며 난생 처음 타보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동료 학우들과 파도치는 푸른 바다와 성산 일출봉, 한라산의 멋진 광경을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담으며 재잘대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려는 부푼 꿈도 잠시, 칠흑 같은 공포와 무서움, 차디찬 물속에서 사투를 버려야 했던 내자식, 내동생들이 못난 어른들의 잘못으로 피지도 못하고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마감해 갔다. 누가 이 나라의 희망이자 동량들을 차가운 몰속에 내버렸단 말인가. 

“엄마 보고 싶어” “힘들어. 살려줘. 무서워. 구조 좀” 

필자는 4월 30일(수)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다녀왔다. 가는 내내 기분이 찹찹하고 침울했다. 서울 신길동에서 버스를 타고 1호선과 4호선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조문객 셔틀버스가 운행되는 고잔역에 도착한 시간은 14:30분경이었다. 고잔역 1층 대합실에 도착한 필자는 파란색 점퍼를 입은 (안산시)자원봉사단원의 안내를 받으며 역 앞 우측으로 돌아 100미터쯤 가자 분양소 셔틀버스 두 대가 길게 줄을 선 조문객들을 하나둘씩 태우고 있었다.
 그들 틈에 끼어 차에 올랐다. 셔틀버스는 만석이 되자 출발했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안산시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다. 시내 곳곳에 세월호 침몰을 애도하는 각종 펼침막 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10여 분간 지나 분향소 입구에 도착한 필자는 100미터 넘게 줄 지어 서 있는 조문객 뒤에 서서 분향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줄을 서 있는 동안 필자의 앞뒤로 서 있는 조문객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너무 끔찍한 사고 였다”, “살릴 수 있었는데 초기 대응을 못했다”, “탑승 인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를 어떻게 믿고 살아가야 하는 지 막막하다”며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은 물론 2시간 동안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구조 활동을 못한 해경이 협살(挾殺)한 사건이다”며 육두문자에 가까운 표현을 하며 무책임 정부를 질타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분향소 입구에 들어서자 우측으로 안내되었고 긴 탁자 위에 놓여 진 방명록에 서명하고 나자 자원봉사자가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손에 쥐어주어 받아들고 조문행렬에 맞춰 분향순서를 기다렸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문객들의 숙연한 분향 모습과 소리 없는 울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맺게 했다.  

 

 

▲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의 발걸음

조문순서에 맞춰 분향을 마치고 나오면서 다 피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어린 학생들의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영정사진 하나하나 보는 순간 가슴이 찡했다. 눈물이 났다. 특히 단원고 박예슬(17) 학생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아찔했다. 전날(04.29) JTBC ‘뉴스 9’가 공개한 동영상이 떠올랐다. “헬리콥터가 와”, “얘들아 원래는 이건데 되게 많이 기울었다. 기울기를 어떻게 풀었지? 원래는 이건데”, “힘들어. 살려줘. 살려줘”, “다리아파”, “와~ 바다로 뛰어 내린다”, “엄마 보고 싶어”, “살 건데 무슨 소리야”, “살아서 보자?? “아 어떡해. 무서워. 무서워”, “여기가 지금 복도입니다”, “힘들어. 살려줘. 무서워. 구조 좀” 어린 학생들의 대화 동영상이 떠올랐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사랑하는 엄마, 아빠,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 죽음의 순간에 얼마나 원망 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분향소를 나오는 수많은 조문객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출구 옆을 지나가니 대한적십자사가 운영하는 자원봉사센터에서 조문객을 비롯하여 나에게도 컵라면을 권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시리고 아픈데 컵라면이 입에 들어갈까, 그런데 대한민국 교육부 수장,  장관(서남수)이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자식을 잃고 슬픔에 젖어 통곡하고 있는 유가족 틈바구니에서 그것도 유가족은 맨바닥이고 장관이라는 사람은 팔걸이의자에 앉아 아무 부끄럼 없이 컵라면을 먹었다. 후안무치, 뻔뻔한 민낯을 들어냈다. 이를 문제 삼는 여론에 대통령을 대변하는 청와대 대변인은 한술 더 떠 “라면에 계란을 넣어서 먹은 것도 아니다”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궤변 아닌 궤변을 늘어놓았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사과한 부분에 대해 “유족들이 사과가 아니라고 한다”며 청와대 입장을 묻자 “안타까운 일이죠. 유감스러운 일이죠”라고 말 했다가 빈축을 샀다. 열흘 동안 세 차례나 구설에 올랐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날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분양소 입구 좌측에 마련된 단원고총동문회 천막 안으로 들어가 총동문회 봉사단장에게 소속을 밝힌 뒤 위로의 말을 전하며 “가장 시급히 도울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고맙지만 현재로서는 성금도 필요 없고 언론에 비치는 것 역시 조심스럽다”며 “지금 우리 (총)동문회는 천사(희생학생 지칭)들을 더욱 편안하게 보내드리데 주력할 것이며 추후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히 강구하겠다”며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감추며 비장한 속내를 내비쳤다. 필자는 더 이상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자리를 단원고교 교정으로 옮겼다.

 

 

▲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글이 적힌 노란리본.

노란리본에 담긴 수많은 사연 

분향소 출구 우측 100미터 길가에서 택시를 잡은 필자가 자리에 앉아마자 택시기사 분이 “고맙다, 어디서 왔느냐”며 인사를 건넸다. 필자의 양복 가슴에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글이 새긴 노란 조문리본을 보고 인사를 한 것이다. “서울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자 “안산시 전체가 초상집이다. 단원고 학생들이 대체로 가난한 아이들이다. 학교 앞 빌라촌아이들이 대부분이고 저쪽 아파트에 사는 학생들이 한 50여명이 되고 나머지는 이쪽 아이들이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세월호 침몰 사고는 못된 어른들이 저지른 살인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죽일 X들이라"고 했다. 늦장 대응한 해경과 우왕좌왕, 무능한 정부를 탓하고 있었다. 그 사이 기본요금보다 조금 더 나온 짧은 거리에 있는 단원고에 도착한 필자는 학교 정문 좌측 담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국화송이 꽃들과 이름 모를 수많은 조문객들이 애도하며 적어 놓은 글들을 보았다. 형형색색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여 있었다. 필자도 삼가 조의를 표하는 글을 써 명복을 빌었다. 인도 옆 가로수에는 누군가가 쳐 놓은 줄에 노란 리본들이 수많은 사연을 담아 단원고 학생들의 희생에 목 놓아 울부짓고 있었다.
또한 어린학생들이 평소 자주 먹는 과자종류, 아이스크림, 음료수, 빵, 떡볶이, 심지어 순대까지도 예쁜 그릇에 담아 고인들에게 삼가 바쳤다. 눈물이 났다. 필자가 도착한 시간은 17:00시경으로 학교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정문에서 경찰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올해로 7회 졸업생을 배출한 단원고 앞은 실록의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쓸쓸하고 고요했다. 인적이 드물었다. 빌라촌으로 이뤄진 학교 앞 주택가는 “한집 건너 한집이 희생자 학생집이다”라고 말한 인근 상가 주인의 말에 그저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객선 세월호 침몰로 희생되거나 실종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형제·자매만 140여명에 이르며 교사와 2학년 학생이 262명이다.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 등 모두 339명이 제주도 수학여행을 위해 승선했으나 구조자는 불과 77명이었다. 참으로 안타깝다. 필자는 돌아오는 길에 차를 타지 않고 고잔역까지 걸어갔다. 15여분 정도 거리의 길가에는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애도의 물결을 이뤘다. 곳곳에 펼침막들이 애도와 위로,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형, 누나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00, 00”, “세월호 침몰 안타까운 희생자 여러분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쓰여진 펼침막들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곪을대로 곪은 총체적 무능에 분노    

2014년 5월 2일 오전 11시 기준 사망자 226명, 실종 76명이고 안산 정부합동분향소 26만 명을 비롯하여 전국 114개 지자체 분향소를 다녀간 추모객은 75만 명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 내몸이 소중하면 남의 몸도 소중하고 내자식이 소중하고 귀하면 남이 자식 또한 소중하고 귀하거늘 어찌 이런 슬픈 일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단 말인가, 아니 물을 수 없다.
총체적 무능한 정부와 복지부동, 무사안일 타락한 공무원 사회를 보는 것 같아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누군가는 이 야만의 한국사회를 기록하고 바로 잡아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국민의 몫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 국민의 이름으로 고한다. 대한민국 여객선사 중 규모가 큰 회사 청해진해운이 운영하는 ‘세월호 안전핵심 갑판, 기관부 70% 비정규직’, 운항선장도 1년짜리 계약직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최대주주 유병언 일가가 세월호 이름을 짓고 이름값으로 출항할 때 마다 100만 원씩 받고 상표장사로 500억 원 회삿돈 챙긴 사실에 놀랍고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도 구출에 신경도 쓰지 않고 화물량 조작에 기가 막혔다. 경천동지할 일이다. 한때 세모그룹에 근무했던 이용욱 정보수사국장의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수사에 참여했다는 사실. 피의자가 된 선장, 선원 11명을 모텔서 지내도록 하면서 충분히 서로 말을 맞출 수 있게 방치한 해경, 사고당시 촬영한 동영상을 편집하면서 12일 만에 공개한 해경, 그리고 그 동영상에 나타난 무책임한 해경의 안이한 구조, 촌각을 다퉈 밧줄을 타고 선실로 뛰어 들어가 어린 학생들을 구조해야 할 해경이 선실에 진입도 하지 못하고 구조된 선장과 선원들에게만 몰려가 우왕좌왕하며 구조하는 모습에 경악과 분노를 넘어 고소를 금치 못하겠다.
그렇게 귀중한 구조시간 두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운전 할 사람이 없어 고속정을 못 띄운 해경, 이 뿐만 아니다. 배로 와도 70분인데 해경 잠수사가 150분 지나 현장 도착, 그것도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의 해경, 이게 바로 대한민국 해경의 민낯이다. 탑승자, 사망, 실종자 통계도 못내는 정부, 참사 피해자를 조롱하거나 색깔론으로 몰아세우는 몰지각한 국회의원과  국민을 미개하다고 폄하했던 한 광역단체장 후보의 아들, 유구무언, 할 말을 잊는다. 참으로 부끄럽고 어이없고 치욕스럽다. 단원고 박수현 군과 박예슬 여학생이 촬영한 동영상을 봐라 ‘산 채로 수장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슬픔에 잠긴 유가족 앞에서 우리는 석고대죄해야 할 판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