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 최대 화학회사 꿈꾼 한국비료공업, ‘사카린 밀수사건’에 발목
은퇴 후 2년만에 복귀한 이병철 창업주, 미래사업으로 ‘전자’ 낙점
1987년 취임한 이건희 회장, 반도체·스마트폰 ‘세계 1위’로

[민주신문=서종열 기자]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 사진)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삼성전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타계하면서 그의 발자취에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과거 TV 수상기를 만들며 해외에서 천대받던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삼성전자의 탄생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결단으로 삼성전자가 생겨났지만, 이 과정에 적지 않은 뒷얘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 이병철 회장을 위기에 몰았던 한비사건

삼성그룹이 전자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70년부터다. 

삼성그룹은 당시 삼성전자공업이란 회사를 출범시키며 일본 산요로부터 기술을 이전 받아 흑백TV 생산에 나서며 전자산업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삼성그룹이 애초부터 전자산업에 진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만 해도 삼성그룹은 화학산업을 그룹의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이에 한국비료공업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 보증을 받은 후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역대 최대 규모 비료공장 건립에 나섰다. 

그러나 1966년 5월 말 한국비료가 부산항을 통해 사카린 2259포대(약 55t)를 몰래 들여온 사실이 부산세관을 통해 적발됐다. 정확히는 OTSA라는 제품 때문이었다. OTSA는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의 원료물질이다. 

밀수 사실은 곧바로 신문에 ‘재벌밀수’란 제목을 달고 보도됐다. 그리고 이 밀수사건은 총선과 맞물리면서 삼성그룹 존립을 뒤흔드는 대형 스캔들로 비화됐다. 실제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두환씨는 이 사건과 관련 국회의사당에 오물을 몰래 들여와 장관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삼성그룹의 1960년대 미래사업이었던 한국비료공업(현 롯데정밀화학)의 요소공장 부지 전경. 한국비료공업은 밀수사건 이후 국가가 운영하다가 1994년 다시 삼성그룹(삼성정밀화학)에 인수된 후, 2006년 롯데그룹에 매각됐다. ⓒ 롯데정밀화학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당시 일본에서 이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귀국해 대책마련에 나섰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2일 “한국비료공업 지분 51%를 국가에 바치고 모든 사업에서 물러나겠다”며 재계 은퇴를 선언했다. 

한국비료공업은 이후 1994년 삼성그룹에 다시 인수돼 사명을 삼성정밀화학으로 변경했다. 이후 2016년 롯데그룹이 다시 인수해 현재는 롯데정밀화학으로 이름이 변경됐다. 

 

◇ 해결책 전자산업, 반도체까지 이어져

재계를 은퇴했던 이병철 창업주는 초야에 묻혀서도 삼성을 염려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68년 2월 삼성물산 회장으로 조용히 복귀했다. 

경영일선으로 돌아온 이병철 창업주는 그룹 내 인재들을 조용히 불러모아 ‘개발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개발부에 삼성그룹의 미래 먹거리에 대한 연구를 맡겼다. 

그리고 이 개발부는 ‘전자산업’에 대한 청사진을 담은 보고서를 이병철 창업주에게 올렸다. 

이병철 창업주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전자산업 추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사돈관계였던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와 불편한 관계가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 시장은 LG그룹(당시 금성사)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사돈관계에 있던 삼성그룹이 진출하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난관에도 사업을 밀어붙인 이병철 창업주는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자본금 3억3000만 원으로 설립했다. 그리고 단 2년만에 흑자를 내며 성장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어렵사리 첫발을 디뎠던 삼성전자는 1975년 기업을 공개했다. 당시 공모가는 주당 1000원으로 공모가액 기준 기업가치는 30억 원에 불과했다. 이랬던 삼성전자는 45년만에 시가총액 360조 원을 돌파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전자 핵심사업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두 축으로 나눠진다. 가전부문도 상당한 규모지만, 아직까지 두 부문의 매출 규모와 비교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했던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에서 둘째) ⓒ 삼성전자

이중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반도체였다. 

이병철 창업주는 1983년 2월 일본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은 이날을 기려 ‘2·8 도쿄 구상’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공장 부지가 마련됐다. 

당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미국과 일본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일본기업들의 반발도 거센 것으로 알려졌다. 

어려움을 겪던 반도체 사업은 1992년 권오현(현 삼성전자 상임고문) 이사가 64M D램을 개발하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어 당시 삼성에서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던 황창규 전 KT그룹 회장이 ‘반도체 메모리 용량은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을 실제로 입증하면서 삼성전자는 그야말로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 이건희의 승부수, 스마트폰

반도체 사업의 기틀을 이병철 창업주가 마련했다면 스마트폰 부문은 고 이건희 회장이 이뤄냈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초반 휴대폰 사업에 진출했다. 이어 1994년에는 ‘애니콜’이란 브랜드를 선보이며 휴대폰 시장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모토로라와 노키아 등 당시 휴대폰 시장의 강자들이 국내로 진출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엄청난 불량률 때문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휴대전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제품에서 높은 불량률을 기록하며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1994년 애니콜 15만 대를 기흥공장 공터에 쌓은 뒤 불태웠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이었다. 이후 삼성전자 제품의 불량률은 획기적으로 낮아졌고, 소비자들의 신뢰도가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올림픽 공식파트너로 지정되면서 애니콜은 글로벌 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여세를 몰아 ‘가로본능’, ‘벤츠폰’, ‘이건희폰’ 등 다양한 모델의 밀리언셀러 폰을 선보였다. 

2012년 미국에서 열렸던 세계가전박람회(CES)에 참석한 고 이건희 회장 ⓒ 삼성전자

2008년에는 애플의 아이폰에 대항해 ‘옴니아’ 시리즈를 선보였으며, 2010년 현재의 안도로이드 운영체제인 ‘갤럭시’ 시리즈가 출시됐다. 

이후 삼성전자는 2011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판매량 1위에 오르며 ‘글로벌 삼성’의 위상을 전 세계에 떨쳤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부문의 성과는 모두 고 이건희 회장이 직접 경영을 맡던 당시 달성한 업적”이라며 “사업 과정에서 공과 과는 있었겠지만, ‘세계 1등’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존경할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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