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지음 ▲행복우물 ▲1만5000원

[민주신문=김현철 기자] 몇 십 분마다 판을 갈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면서도 LP 음악을 즐겨 듣는 이유는 아날로그 음원만의 매력 때문이다. 지글거리는 먼지 소리도 이따금 같은 자리를 맴돌며 투닥거리는 바늘 소리도 음악이 된다. 어떤 이의 기억은 찌든 얼룩처럼 지우려 할수록 자꾸만 번져버린다. 어떤 이의 기억은 숨처럼 평생을 함께 드나든다. 누군가를 떠나며 남긴 나의 기억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흑백사진은 인생과도 닮았다. 늘 노력 한만큼의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 우연한 순간으로 인해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맞닥뜨리는 것, 그리고 문명의 이기에 기대어 잃어버리는 것 또한 그러하다. 

봉숭아물은 마르고 거친 손을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천연의 미용 재료였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속설 때문에도 여름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봉숭아 꽃잎을 따러 다녔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들의 손은 모두 붉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인 것 같다. 풍경이고 사람이고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지금도 종종 우물 안을 들여다보듯 내 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나 역시 그 시절 우물처럼 빠져 있는 것들에 따라 매번 다른 냄새 다른 모습이다.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표기를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앓음다움’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즉, ‘앓은 사람답다’라는 뜻으로 고통을 앓거나 아픔을 겪은 사람, 번민하고 갈등하고 아파한 사람다운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라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리운 것은 첫사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유 없이 볼이 발그레해지던 그 시절 나를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 가난, 잃어버린 꿈. 깊숙이 묻어뒀던 말들을 건져 손 위에 올려놓았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말들이 살아나 달리기 시작했다.

『아날로그를 그리다』 이 책의 저자 유림(釉淋)의 글과 그림은 빨리 빨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아련한 추억속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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