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만원으로 시작한 ‘세계경영’ 신화…그룹 해체 → 해외도피 ‘굴곡의 삶’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뉴시스

[민주신문=이민성 기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대우그룹의 창업주 김우중 전 회장이 지난 9일 밤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10일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우중 전 회장은 한때 현대에 이어 국내 2위 자산규모 대우를 이끈 1세대 경영인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99년 8월16일 김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창업 31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자산총액이 76조원,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던 굴지의 대기업은 어떻게 무너져 내렸을까.

대우의 탄생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36년 대구 출생으로, 1960년에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성실업에 입사해 동남아무역을 담당하던 김 전 회장은 회사를 나와 1967년 3월 22일 대우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한다. 회사명은 동업자 도재환이 근무하던 트리코트 원단업체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 전 회장의 이름 우(宇)를 따서 지었다. 이 회사는 서울 명동에 20평 남짓한 사무실과 자본금 500만원, 직원은 5명으로 시작했다. 대우실업이 창립한 해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돼 정부는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시도했다.

이에 김 전 회장은 한성실업에서 쌓은 무역 경험을 바탕으로 트리코트 원단을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동남아 시장에 수출했다. 대우실업은 창업 9개월 만에 트리코트 한 품목만으로 58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이는 당시 국내 트리코트 전체 수출의 11.2% 비중이었다. 이어 1968년 수출액은 291만 달러를 달성했으며, 이듬해는 365만 달러를 기록했다.

김 전 회장은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를 호주 시드니에 설립하면서 해외영토 확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어 에콰도르(1976년),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도 개척했다. 1978년 한해 대우의 총 수출 대상국가는 106개국이며, 상품은 1437종에 달할 정도였다.

또 6억4866만 달러의 수출실적으로 국내 13개 종합상사 중에서 1위에 올라 그 자리를 4년간 굳건히 지켰다.

대우실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김 전 회장은 빠르게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1973년에는 일성신약의 창업주 윤병강 회장이 세운 동양증권을 인수하며 금융업에 뛰어들었고, 같은 해 대우건설의 모태인 영진토건을 인수했다. 대우는 1973년 한 해에만 무려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다. 1978년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이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자동차 티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룹으로 전환

80년대에도 대우의 성장은 계속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실업 창립 15주년을 맞아 1982년 대우실업ㆍ대우개발을 합병해 (주)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했다.

그룹으로 태어난 이후에도 인수는 멈추지 않았다. 1983년 대한전선이 소유하고 있던 대한통신 주식 잔여분을 인수해 광진전자와 흡수합병을 통해 대우통신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김우중 회장의 경영방식은 자체적으로 계열사를 만들기보다는 부실한 기업을 인수ㆍ합병하는 식으로 기업을 성장시켰다.

김 전 회장이 탄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사분규와 조선산업의 불황으로 대우조선은 파산 직전까지 갔고, 그룹 전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노사분규로 약 3481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이는 같은 기간 대우조선 매출액의 11%다.

김 회장은 노사분규 해결을 위해 1년 반 동안 옥포조선소에 머물며 자전거를 탄 채 현장경영을 지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0년대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생전 모습.사진=뉴시스

사회주의 붕괴와 ‘세계경영’의 시작

대우는 90년대 접어들어서도 내수보다 해외시장에 힘을 쏟았다. 이때 김 전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과 함께 ‘세계경영’을 선포하며 해외로 뛰쳐나갔다. 김 전 회장은 2000년까지 650개 해외 산업 기지 구축과 해외 현지 매출 57조원 달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다. 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와 잘 맞아 떨어졌다.

대우는 사회주의체제 붕괴를 계기로 선진국의 자동차업체들이 진출하지 않았던 지역에 발을 들였다. 1987년 중국을 시작으로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소련, 불가리아 등에 지사를 개설했고, 현지에 대우자동차의 공장을 직접 설립해 생산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해외시장 확장을 위해 1년에 3분의2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다. 아프리카에서 시베리아까지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김 전 회장은 시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대우자동차의 동구권 진출과 함께 대우정밀, 대우기전, 동원금속 등 약 70여개의 국내 부품업체들도 동반진출 했다. 대우가 진출한 국가들은 시장잠재력이 뛰어났지만 산업기반이 취약해 부품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국외법인을 포함해 계열사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같은 해 대우는 삼성을 넘어 재계 2위에 오르게 된다.

무리한 차입경영의 몰락

승승장구 하던 대우는 1997년 11월 IMF(외환위기)를 맞이했다. 이전까지는 대우 본사가 지급보증을 서면 해외법인은 자금을 빌리는게 가능했다. 하지만 IMF를 겪고 한국의 신용이 밑바닥으로 떨어져 돈을 빌리기 어려운 상황에도 쌍용자동차 인수 등 ‘몸집 불리기’에 더욱 매달렸다.

김 전 회장의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는 말처럼 공격적인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1997년 말 28조7120억원이던 대우그룹의 총 차입금 규모는 8개월만에 46조2430억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팽창 전략에 치중하던 대우는 과다한 부채를 견뎌내지 못해 심각한 유동성위기에 몰렸다. 이에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다.

그러나 대우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끝내 해체됐다. 결과적으로 김 전 회장의 경영스타일은 독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분식회계 혐의가 드러나면서 구속될 위기에 처한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19일 중국 옌타이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 참석을 이유로 출국한 뒤 종적을 감췄다. 세계를 호령하던 기업인은 수배자로 전락했다.

2005년 김 전 회장은 5년8개월의 해외도피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2006년 재판장에 오른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10일 오후 경기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 조문객. 사진=뉴시스

김우중이 남긴 대우의 유산

그룹 해체 후 대우는 점점 희미해졌다. 뿔뿔이 흩어졌던 '대우맨'들은 2009년 김 전 회장을 중심으로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김 전 회장은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청년 해외 취업 프로그램인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을 운영했다. 이는 청년을 선발해 어학과 비즈니스를 교육한 뒤 옛 대우 네트워크를 활용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취업을 지원하는 것이다. 한 사람당 2000만원 드는 교육비의 절반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대우 임직원 출신들 회비로 충당한다. 지금까지 700여명이 혜택을 봤다. 김 전 회장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귀국하기 전인 지난해 말까지 베트남에 머무르며 GYBM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은 귀국 이후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하다 지난 9일 생을 마감했다. 대우 관계자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BM 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遺志)로 남겼다”고 밝혔다. 이렇게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 진출 지원을 마지막 유산으로 남겼다.

김 전 회장은 떠났지만, 대우의 흔적은 아직도 찾을 수 있다. 그룹이 해체된 지 20여년이 흘렀지만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등이 사명에 '대우'라는 브랜드를 남겨뒀다.

또 대우그룹에서 경험을 쌓은 ‘대우맨’들은 지금도 건재하다. 대표적으로 대우건설 출신인 김현중 한화건설 부회장이다. 그는 1976년 대우건설에 입사해 해외개발 사업본부장을 거쳐 2000년 한화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김 부회장은 故 김우중 회장처럼 해외 시장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 한화건설을 글로벌 건설사로 키워냈다.

셀트리온 창업주 서정진 회장도 대표적인 대우맨이다. 서 회장은 나이 서른넷에 대우자동차 재무 부문 임원에 올랐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 실직했다. 하지만 "앞으로 바이오산업이 뜰 것"이라는 전망에 대우자동차 동료 8명과 셀트리온의 전신인 넥솔바이오텍을 설립해 지금에 이르렀다.

이밖에 이우종 LG전자 VC사업본부장과 손동연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사장, 이윤모 볼보자동차코리아 사장 등도 대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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