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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벤처신화’ 팬택'삐삐'로 사업 시작해…국내 2위 스마트폰 제조사
대기업 틈 바구니서 싹튼 벤처신화... IMF넘고 워크아웃 넘은 오뚝이 팬택
  • 이민성 기자
  • 승인 2019.10.1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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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택의 창업주 박병엽

[민주신문=이민성 기자] 남 부러울 것 없는 회사 ‘맥슨전자’의 영업사원이던 스물아홉 청년 박병엽은 돌연 회사를 그만둔다. 살고있던 10평짜리 아파트 전셋돈 4,000만원을 뽑아 함께 일할 다섯명을 모았다. '우리 10년 뒤는 1조원의 매출을 올리자'라며 터무니 없는 선언을 한다. 국내 TOP3의 휴대전화 제조사로 LG전자와 자웅을 겨루던 벤처의 아이콘 ‘팬택’의 시작이다.

‘벤처신화’의 서막

1990년대는 그야말로 벤처열풍이었다. 팬택도 이런 바람을 타고 1991년, 무작정 무선호출기(삐삐)사업에 뛰어든다.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했다. 당시 국내 삐삐 시장은 외국 제품들의 독무대였다. 특히 세계적인 기업 ‘모토롤라’가 60%의 점유율로 국내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팬택은 국내외 대기업들 틈에서 기술 개발력으로 밀어부쳤다. 삐삐의 자동 다이얼링과 멜로디 기능을 대기업들보다 훨씬 앞서 개발했다.

특히 삐삐의 핵심인 휴대성을 위해 작고 더 작고 가볍게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창업 2년만에 홍콩과 싱가포르 시장에서 40%에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확보했다. 이어 98억의 매출과 430만달러(약51억)이라는 놀라운 실적을 거뒀다.

설립 6년째인 1997년 연매출 762억 원을 달성해 그야말로 기적을 이뤄냈다. 맥슨전자의 직원들이 세운 팬택이 맥슨전자를 넘어섰고 모토롤라까지 위협하게 됐다. 계란으로 바위가 깨지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팬택은 만족하지 않았다. 삐삐로 성장한 기업이 창업때 처럼 돌연 휴대폰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미래에는 삐삐가 아니라 휴대폰이 세상을 지배할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1997년에는 삐삐 가입자가 1500만명을 넘어서고 있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해 팬택은 LG정보통신(현 LG전자)으로부터 OEM(주문자상표부착) 휴대전화 공급 계약을 따냈다.

1997년 당시 국내 휴대폰 시장은 국내기업이 주도권을 모두 뺏어오며 해외기업들은 설자리를 잃었다. 세계최고 모토롤라도 마찬가지였다. 팬택의 성공을 유심히 지켜보던 모토롤라는 인수합병 제의를 하게된다. 하지만 팬택은 단호히 거절하며 투자를 제의했다. 다만 5년 내로 가망이 없다면 얼마든지 인수합병을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이에 모토롤라는 1500만달러(약 180억) 투자를 결정한다.

팬택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영원할 것 같던 삐삐는 불과 2년만에 가입자수가 300만명으로 줄어들며 사양산업이 됐다. 그사이 팬택의 이동전화 부문 매출은 1999년 전년 대비 1232%가 늘어나 말도안되는 성장세를 보였다.

서울 상암동 팬택 본사에서 긴급기자간담회를 열고 사의 표명을 한 박병엽 부회장이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과감한 인수합병의 패착

굳이 잘되는 삐삐를 두고 휴대폰 사업에 뛰어들었던 팬택은 한번 더 과감한 판단을 내린다.

자신들보다 훨씬 큰 기업 현대큐리텔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현대큐리텔은 영업손실만 150억에 이르며 가망이 없어 보였다. 특히 인지도에서도 팬택은 현대큐리텔보다 한참 모자랐다. 이런 이유로 사명도 팬택&큐리텔로 교체하게됐다. 무모한 판단이었지만 이로 인해 단숨에 삼성과 LG에 이은 3위 제조업체로 뛰어올랐다.

큐리텔을 집어삼킨 팬택은 ‘최초’ 타이틀도 모두 집어삼켰다. 국내최초로 33만 화소 카메라를 장착한 휴대폰을 선보이고, 슬라이드폰까지 선보였다. 

성공적인 인수합병을 마쳤던 팬택은 자신감이 넘쳤다. 당시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지금의 아이폰 정도 인기를 가졌던 SKY(스카이)까지 넘봤다. 기존 큐리텔은 보급형 시장, SKY는 프리미엄 시장을 노려보겠다는 의지였다.

팬택은 2005년 SK텔레콤의 자회사 SK텔레텍을 3000억원에 전격 인수했다. 팬택의 인수자금 3000억원은 회사의 시가총액과 비슷한 규모였다. 당시 팬택의 사업보고서를 살펴보면 SK텔레텍과의 합병으로 “오는 2006년 매출수량 1200만대, 매출액 2조2000억원을 목표로 계획하고 있다”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팬택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SK텔레텍을 인수하던 그 해 모토롤라의 휴대폰 레이저가 5000만대 이상 팔리며 전 세계 시장을 휘어잡았다. 이에 팬택은 2006년 말, 매출 1조2692억원, 영업이익 -1670억원, 순이익 -4323억원을 기록했다. 결국, SK텔레텍을 인수한지 1년만에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됐다. 무리하게 몸집을 키운 팬택이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직원만 4600명이던 회사가 해외법인을 포함해 3000명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베가아이언의 광고 사진=유튜브캡처

스마트폰으로 흥한자 스마트폰으로 망하다

끝인줄만 알았던 팬택은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2009년 팬택은 945만 대의 휴대폰을 공급해 매출 2조 1,320억 원, 영업이익 1,480억 원을 달성했다. 당시 휴대폰 시장은 혁명을 겪던 시기였다. 애플의 아이폰 출시로 피처폰이 주류였던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재편됐다.

팬택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삐삐 사업을 과감히 내려놓고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과감히 스마트폰 시장에 발을 디뎠다. 2010년은 국내에 스마트폰이 1000만대 보급됐다. 그해 팬택은 베가,시리우스,미라크,이자르 등의 제품을 끊임 없이 쏟아냈다. 이런 공격적인 행보에 LG전자를 넘어 국내 시장 점유율 2위로 우뚝서는 기염을 토했다.

2011년, 팬택의 ‘베가레이서’는 누적 판매량 180만대를 기록해 대히트를 보여줬다. 같은해 4분기까지 18분기 연속 영업흑자까지 기록했다. 이런 활약에 5년만에 워크아웃 딱지를 뗐다.

워크아웃을 벗어나며 다시 일어났던 팬택은 2012년, 2년 연속으로 스마트폰을 300만대 이상 판매하며 삼성을 뒤이어 2위 자리를 지켰다.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많은 기업들이 난립해 경쟁은 치열해졌다. 팬택은 2012년 한해에만 무려 5개의 모델을 출시했다. 애플의 아이폰은 1년 단위로 한 모델만 내놓는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무리수였다.

이에 팬택의 제품들은 성능과 디자인 등에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용 중에 갑자기 전원이 꺼져버리거나 배터리가 말도안되게 소모되는 등 SKY로 구축한 고급이미지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팬택은 2012년 말부터 위기를 맞았다. 당시 팬택의 부채비율은 2,400%에 육박했다.

분위기 반전을 노리며 2013년에는 문제점을 보완한 야심작 ‘베가아이언’을 부랴부랴 내놨다. 당시 톱스타 이병헌을 앞세워 광고를 했다. “단언컨대, 메탈은 가장 완벽한 물질입니다” 이 문장은 수 많은 패러디를 양산해냈다.

그러나 광고의 인기만큼 스마트폰의 인기는 뜨겁지 않았다. 팬택의 이미지는 무너진지 오래였고 모두 등을 돌린 상태였다. 결국, 베가 아이언이 출시한 해에 삼성전자로부터 5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게된다. 이어 직원 3분의 1이 6개월 무급휴직을 실시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팬택의 부채비율은 5400%까지 치솟으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팬택의 마지막 스마트폰 '아임백'

두 번째 워크아웃, 그리고 I’m Back

이런 악재속 2014년 정부의 이동통신 3사 영업정지 처분은 팬택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됐다. 당시 팬택은 이동통신사에게 1,800억원의 부채가 있었다. 하지만 이동통신사의 영업정지로 인해 하루아침에 스마트폰을 판매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결국 2014년 8월, 두 번째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자력으로 회생할 수 없던 팬택은 매각을 꿈꿨다. 하지만 부채가 1조원을 넘어 인수에 뛰어들 기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3차례나 매각이 수포로 돌아가며 2015년 5월 결국 회생절차를 포기하며 파산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팬택의 임직원들은 자발적으로 모금해 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직원 한명 한명의 이름이 모두 쓰이며 “지금 팬택은 멈춰 서지만 우리의 창의와 열정은 멈추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그해 7월, 극적으로 쏠리드-옵티스 컨소시엄이 팬택을 택했다. 그덕에 극적으로 부활을 꿈꿨고 10월에는 인수가 완료됐다. 팬택이 또 한번 기사회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016년 6월, 1년 7개월 만에 신제품 ‘스카이 아임백(IM-100)’을 출시했다.

IM-100은 영어로 I'm back'이라는 뜻을 가지며, SKY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였다. 아임백의 광고 속 맷돌춤은 대중들을 소름끼치게 했다. 아임백은 출고가 44만원의 저가 제품으로 블루투스 스피커겸 충전기 ‘스톤’을 제공했다. 저가모델로는 파격적이었으며 팬택의 부활의지가 엿보였다. 이에 초도 물량 3만 대를 소진하며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고 다시 일어서는 듯 싶었다. 목표치는 30만대 였으나 13만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이 결과, 4000만원으로 시작해 IMF에도 살아남아 전 세계 7위까지 성장한 휴대폰 제조업체는 초라하게 사라졌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라면 SKY가 올해 다시 부활했다. 5G와 폴더블 폰까지 등장한 요즘 3G에 폴더폰을 들고 나왔다. 무려 아임백 이후 3년3개월 만에 일이다. 팬택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성공신화는 아직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업계에 큰 획을 긋고 떠났다.

이민성 기자  jsss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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