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매각 등 사업개선 주도, 소비재→중화학으로 체질개선...믿음과 신뢰 통해 "사람이 미래다"란 두산웨이 주창

1996년 5월 두산그룹 신 CI 선포식에서 박용곤 명예회장이 새로운 심벌이 새겨진 그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두산 제공

[민주신문=서종열 기자]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3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두산그룹의 가장 큰 어른인 박 명예회장은 재계의 큰 어른으로 평가받았다. 겸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경영'으로 '사람이 미래다'라는 두산웨이를 닦았으며, 소비재 중심이던 그룹의 주축사업들을 과감하게 중화학으로 변화시키는 등 큰 족적을 남겼다.

1932년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당시 해군으로 복무했다. 이후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경영학을 공부했고, 1962년 동양맥주 사원으로 그룹에 합류했다. 그가 동양맥주 사원으로 입사해 맡았던 첫번째 일은 맥주병 세척과 같은 허드렛일이었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와 동양맥주 대표를 거쳐 두산산업 대표에 올랐고, 1981년에는 그룹 회장에 선임됐다.

소비재 기업에서 글로벌 중화학그룹으로

박 명예회장의 첫 직장은 두산그룹이 아니다. 그는 미국 유학 마치고 귀국한 1960년 산업은행 공채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두산그룹에 합류했다.

그룹경영에 나선 박 명예회장은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팀 단위 운영체제를 확립하는 다른 대기업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으며,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도입해기도 했다.

경영에서도 큰 변화를 주도했다. 창업 100주년을 맞은 1995년을 계기로 OB맥주, 한양식품 등 소비재 중심이던 그룹의 주력사업들을 중화학사업으로 교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33개에 달했던 계열사가 20개로 줄어드는 등 선제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의 노력은 곧바로 나타났다. 2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내 대기업들이 혹독한 상황에 처한 것과 달리,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두산그룹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의 글로벌 중장비업체인 밥캣 등을 인수하며, 중화학그룹의 변모를 갖출 수 있었다.

'사람이 미래다' 만든 두산웨이 확립

재계에서는 이런 박 명예회장을 '믿음과 신뢰의 경영인'으로 평가한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후,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겸손함과 한번 신뢰하면 오래도록 지켜보는 신뢰를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과묵한 성격이던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이 미래다'란 두산웨이의 이념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두산 제공

두산그룹의 '사람이 미래다'라는 두산웨이도 바로 박 명예회장의 경영관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박 명예회장은 생전 "인화로 뭉쳐 개개인의 능력을 집약할 때 자기실현의 발판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기업성장의 원동력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라며 "두산의 간판은 바로 두산인들"이라고 했다. 기업이 바로 사람이고, 경영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핵심이란 설명이다.

이런 박 명예회장이 별세하자 재계에서는 아쉬움이 표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장남인 박정원 그룹 회장,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 장녀 박혜원 두산매거진 부회장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5일 오후2시부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며,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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