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FN executive 부사장

최근, ‘포용국가’라는 또 하나의 화두(話頭)가 출렁거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국회 시정연설에서 “함께 잘 사는 포용국가가 내년도 국정 방향”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함께 잘 사는 것이 뭐냐?”는 등 ‘포용국가’의 개념에 대한 말들 또한 ‘소득주도’만큼이나 이견이 분분하다. 민주국가에서 다른 견해 또는 다른 해석을 가진다는 것은 소중한 자유다. 그러나 차제에 ‘포용(包容)’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가치, 그 자체에 함께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해납백천(海納百川)이라고 했다. 바다가 넓어진 까닭은 어떤 강물도 배척하지 않고 함께 품었기 때문이다. 포용은 품격있는 정치의 본질이다. 우리의 정치가 지금의 수준에서 한 단계 점프 업을 하지 않으면 저질정치의 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국민은 피곤하다 못해 쪽팔린다. 링컨 등 동서고금의 위대한 리더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포용’이다. 정치인은 국정의 리더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포용력이다. 포용력이 없는 정치인은 리더가 되기는 고사하고 혼자만 잘난 체 하는 무명의 골목대장에 다름아닌 것이다.

포용은 또한 차이의 인정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그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다”는 말이 존재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시리즈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이런 개방성과 포용성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샐러드 볼 사회(Salad Bowl Society)’와 맥락을 같이 한다. 샐러드 볼 사회란 다양한 문화가 샐러드의 여러 재료처럼 각각의 독특한 특색을 잃지 않은 채 조화되는 사회를 말한다. 특히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이견을 인정하지 않는 밴댕이소갈딱지로는 진정한 리더의 정치인이 될 수 없다.

포용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타인을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포용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누구를 감싸 안아야 하는가? 우리의 현실 정치 무대에서는 당연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집권 여당이 해야한다. 이는 지난 대선 때의 약속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가 모래성처럼 사라진 후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이 통합이었고 통합의 새 질서를 내세운 문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준 사람들이 많다. 포용은 애정과 신뢰다. 그것을 갖추는 것이 이른바 강한 리더십을 만드는 일이다.

포용력의 극대화는 타이밍에서 나온다. 즉 언제(When)하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이야 말로 포용력이 실천적으로 발휘 되어야 할 시점이다. 필자가 확인한 이른바 민정(民情:국민의 사정과 생활 형편)에 대한 체감은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니다. “나라 꼴이 이게 뭐냐”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린다. 심지어 대통령에 대한 상스러운 욕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문재인 브랜드를 지지한 필자에게는 “당신, 책임져요”라는 힐난과 함께 필자를 마치 죄인 대하듯이 한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브랜드의 지지율은 점점 하향 추세에 있다. 방법은 하나다. 포용력을 지금 당장 힘껏 발휘하는 것이다.

2019년 새해 소망을 미리 말했는데 주변의 반응이 예상보다 컸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나의 새해 소망은 다음과 같은 플라톤의 멋진 경구가 자주 떠오르지 않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독단과 막말이 아닌 포용과 협치(協治)의 꽃이 여의도에 활짝 피어나기를 기도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