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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응의 브랜드 파워] 노(盧)노(魯)노(No)
  • 김정응
  • 승인 2018.07.3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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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FN executive 부사장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영면했다. 깨끗한 정치, 특권과 기득권 폐지, 진보정치의 상징, 약자의 대변인, 이런 말들이 평소 그를 상징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권 풍토에서 이런 류의 말을 듣는 정치인을 보기란 드물다.

필자 주위의 지인들은 노의원을 천연기념물 같은 정치인이라는 표현도 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크다. 자연스럽게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언론에서의 표현도 그의 죽음에 대한 각별함이 묻어난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한국 정치의 귀한 자산을 잃었습니다.”
“왜 그렇게 꼭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뚝심인사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다”
“이거 오보 아닌가요?”

장례식장 한켠에 빼곡히 붙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글에는 절절함과 안타까움의 정도가 더욱 깊게 묻어난다.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으로 대변되는 여타 정치인과는 달리 신뢰할 수 있고 희망을 볼 수 있는 정치인에 대한 진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이른바 ‘노회찬 현상’이 뜨거운 여름을 더욱 달구었다.

인간 노회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보수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그의 빈소를 찾아 추모했다. 이것은 평소에 그가 남다른 정치인 브랜드였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뜻한 인간미와 편협하지 않았던 그만의 차별화된 정치 역량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는 길이 더욱 아프다.

차제에 필자는 ‘정치인 자살방지법’이라도 제정했으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극단적인 선택은 답이 아니다. 정치란 결국 잘 살고자 함을 다스리는 것 아닌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저마다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에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몇가지 이유가 더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정치인은 향도(嚮導)다. 나라의 나갈 길을 안내하고 막힌 길에는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한다. 정치를 경제, 사회, 문화 등 그 무엇보다 맨 앞에 놓는 이유다. 브랜드 용어로 치자면 맨 위에서 아래의 각 분야별 브랜드를 포용하여 감싸는 우산 브랜드와 같은 역할이다. 당연히 영향력과 중요성이 여타 분야보다 크다. 스타 정치인 이른바 러브마크 수준의 정치인 브랜드들의 경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노의원의 죽음에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정치인은 공인(公人)이다. 내 몸이면서 내 몸이 아니다. 국민에게 선택을 구했고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지역구민이 있고 그와 공감하는 많은 국민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개인 플레이를 하면 당연히 경고를 받는다. 하물며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은 백태클 그 이상의 엄중 경고 감이다. 마음을 섞은 국민에게 망치로 뒤통수를 치는 격과 다를 바 없다.

정치인은 역사(歷史)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역사로 남는다. 역사에는 정사와 야사가 있듯이 영광과 굴욕도 함께한다. 완벽한 우량 역사만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정치인 개인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노의원의 이번 정치자금법은 그의 개인적인 정치역정에서 볼 때 옥의 티 수준인데 그것조차도 인내하지 못하는 고결함이어서 오히려 바보스럽다.

차라리 깨끗이 시인하고 처벌받고 개선하는 정공법을 선택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역사는 잘하면 잘한 대로 못하면 못한 대로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은 늘 국민을 섬긴다고 말한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무거운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도 태연하게 버티기 작전으로 일관하는 정치인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즉 많은 정치인의 국민 섬김 수준이 그 정도인데 상대적으로 국민 섬김이 각별했던 노의원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노 의원은 남한 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이 지녔던 각각의 입장을 자신의 양 심장에 더불어 가졌던 것일까?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당장은 수치스럽지만 목숨은 구할 것인가, 아니면 명분과 책임을 쫓아 목숨을 버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 더 이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이야 한다. 노(盧)와 노(魯)로 끝을 내야 한다. 앞으로는 절대 노(No)다.

김정응  tiger@fnexecut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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