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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건축을 거닐다](3) 근대 디자인과 국제건축의 산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신교사 (1925~26)
  • 김현섭
  • 승인 2018.06.0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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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서양의 근대건축을 논함에 있어 우리는 결코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근대건축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대를 선도하던 유럽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만나 함께 교류하고, 학생들과 작업하며, 전위적 정신을 전 세계로 퍼뜨렸기 때문이다.

특히 바우하우스는 근대적 디자인 교육기관으로서의 명성과 ‘국제건축’의 상징이라는 위상을 씨줄과 날실 삼아 견고한 신화를 직조했다고 하겠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근대건축의 대표적 선구자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1919년 바이마르에 창설한 디자인학교로서, 기존에 있었던 공예학교와 순수미술학교를 병합한 것이다.

창립선언서가 명시하듯 그로피우스는 이 학교를 통해 건축과 공예와 미술을 통합한 하나의 길드를 조직하길 원했고, 이것이 새 시대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이상은 19세기 중반부터 윌리엄 모리스에 의해 주도된 영국 수공예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며(본 연재물 1회분 참조), 더 가까이는 그로피우스 자신이 관여하던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이 (모리스 운동의 정신과 공업생산의 결합을 핵심적 기치로 삼으며) 지향했던 바와 궤를 같이 했다.

초창기의 바우하우스에 여전히 수공예적 특성과 전통적 도제방식의 흔적이 간직됐다면, 1922년 전후로는 방향성이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고, 기계생산에 적합한 쪽으로 흐르게 된다. 여기에는 테오 판 두스뷔르흐를 통한 네덜란드 더 스테일(De Stijl)의 영향과 엘 리시츠키를 통한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 등이 큰 모티브로 작동했다.

바우하우스 교육에 중추적이었지만 신비주의에 경도됐던 스위스 화가 요하네스 이텐이 사퇴하고, 그 자리를 헝가리의 전위적 예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가 이어받은 것도 동일한 변화의 흐름에 속한다. 

이러한 변화가 표명된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건설(Idee und Aufbau des Bauhaus)」(1923)이라는 글은 새로운 시대정신(Zeitgeist)의 강조와 함께 기계의 사용과 대량생산의 필요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창립선언서의 노선으로부터 큰 전환을 보였다. 이때 형성된 디자인 경향, 즉 보편성, 단순성, 합리성, 표준화의 추구, 기능주의, 전통으로부터의 탈피 등이 바우하우스의 대표적 어휘이자 근대 디자인의 정수가 된 것이다.

독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사진=김현섭

그러나 이러한 급진성 까닭에 바우하우스는 보수적인 바이마르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1925년 좀 더 자유로운 데사우로 이전하게 된다. 허나 혁신가에게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리라. 이를 계기로 그로피우스가 새로운 터전에 바우하우스 건물(과 교사들의 주택)을 신축함으로써(1925~26) 자신의 건축적 꿈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 신교사는 워크숍, 강의실, 기숙사 공간을 건물의 각 동에 나누어 수용했고, 연계 블록이 이들을 서로 이어준다. 배치도는 마치 바람개비 형태를 연상시키는데, 그로피우스는 여기서 전래의 대칭성을 벗어난 공간의 기능적 분산을 강조했다. 4층 높이의 워크숍 블록이 2~4층을 전면 유리 커튼으로 뒤덮은 것 역시 두드러진 특성이다.

지그프리드 기디온은 유리의 투명성을 통한 공간의 상호관입에 천착하며 이를 다시점의 동시간성을 내포한 입체파 회화와 견줬다(Space, Time and Architecture, 1941). 독일공작연맹 전시관(1914)으로 니콜라우스 펩스너(Pioneers of the Modern Movement, 1936)에게 낙점 받았던 그로피우스가 이제는 바우하우스 신교사를 통해 기디온의 근대적 시공간을 대표하는 이로 확증된 셈이다.

바우하우스 신교사로부터 ‘국제주의양식(The International Style)’의 도래를 읽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1932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국제주의의 원칙으로 내세웠듯 바우하우스 건물이 매스보다는 볼륨을, 대칭성보다는 규칙성을 강조했고, 장식 또한 완전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후적 논증보다 더 중요한 까닭은 그로피우스 자신이 1925년 ‘바우하우스 총서(Bauhausbücher)’의 제1권으로 출판했던 『국제건축(Internationale Architektur)』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페터 베렌스의 AEG 터빈공장(1910) 이래의 최신 건축 프로젝트를 모은 도판집이다. 서문에서 그로피우스는 시대를 특징짓는 ‘통일적 세계상’과 주관의 제약에서 벗어난 ‘객관적 가치’를 내세우며, 인류 전체를 포괄할 ‘국제건축’을 주창한다. 이러한 이념의 표출이 바로 이듬해 완공된 바우하우스 신교사였던 것이다. 『국제건축』의 1927년도 제2판에는 이 건물의 항공사진도 삽입됐다.

데사우로 이전한 바우하우스는 가히 황금기를 구가한다. 최신의 국제적 건물이라는 물리적 환경 위에,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마르셀 브로이어, 요셉 알버스, 오스카 슐레머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진보적 예술가들이 교육의 최전선에 포진됐기 때문이다.

비록 1928년 그로피우스의 사임으로부터 1933년 나치에 의해 문을 닫기까지 바우하우스의 성격이 상당히 변질됐으나(후임 교장이었던 한네스 마이어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이전의 명성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역사적 의의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양한 층위의 예술운동과 정치적 상황과 개개인의 열망이 교차되며 만들어낸 근대의 진보적 디자인은 다름 아닌 바우하우스라는 울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가구, 회화, 조각, 직물, 도기, 포스터, 타이포그래피에는 디자인을 산업사회에 합치시키려는 시대적 이상이 녹아들어 갔으며, 바우하우스 신교사는 이 모두를 융화한 모더니즘의 산실이자 국제건축의 표상이었다.

설령 현대의 탈근대적 상황에서 바우하우스의 유산이 비판받고 거부된다 할지라도 그들이 꾸었던 꿈에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가치가 아로새겨있다. 예술과 건축의 총체성을 획득하려는 노력,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려는 비전과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살아가는 우리네가 끝없이 맞이해야할 도전이자 교훈인 것이다.

* 이 글은 필자가 쓴 《건축수업: 서양 근대건축사》(도서출판 집, 2016)의 바우하우스 챕터를 요약한 것입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이 책을 참조해주세요.

김현섭  archistory@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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