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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근대사 깃든 ‘아관파천’…6·25전쟁 후 첨탑만 남은 러시아공사관 복원 시동중구, 기자들에 공개 복원·정비 추진...을미사변 후 고종 1년간 거처
  • 양희중 기자
  • 승인 2018.05.1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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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러시아공사관 탑 내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건물. 중구청은 10일 정동야행을 앞두고 비공개 구역인 옛 러시아공사관 배부 시설을 출입기자들에게 공개했다.

[민주신문=양희중 기자] 아관파천은 120여년 전인 1896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그해 2월 11일부터 조선의 왕궁을 떠나 약 1년간 러시아 공관(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구한말 비운의 근대사를 간직한 ‘아관파천’의 주무대인 서울 정동 옛 러시아공사관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0일 서울 중구는 매년 서울 근대사를 재조명하는 ‘정동야행’ 행사를 앞두고 옛 러시아공사관 내 탑 내부를 언론에 공개하며 복원 작업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이곳 소재지인 중구는 자료조사와 함께 고증·기본설계 등 종합계획을 마련하고 발굴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또한 이 과정 전반에 관한 용역을 수행할 업체 선정 절차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아쉽게도 6·25전쟁 때 대부분의 구조물이 파괴됐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16m 높이의 탑뿐이다. 공사관 건물은 1890년 건립됐고 벽돌로 된 2층 건물에 입구에는 개선문 모양의 아치문이 있었다. 

원형을 되찾으면 근대사의 주요무대였던 정동을 찾는 많은 시민들은 공사관 안팎을 둘러보며 비운의 역사인 아관파천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897년 2월까지 약 1년간 이곳에 머물며 국정을 수행했다. 

서울 중구 옛 러시아공사관 탑

당시 고종은 친위 기병대 설치, 지방제도와 관제 개정 등에 관한 명령을 내렸고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최측근인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에 임명해 영국·독일·러시아로 보내기도 했다. 또한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에 앞서 환구와 사직 등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고종이 피신할 때 후궁인 엄비가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엄비는 고종의 승은을 입은 후 명성황후에 의해 1885년 궁밖으로 쫓겨났으나 을미사변후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재입궁한다. 

엄비는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을 보필하며 43세에 아들을 잉태했는데 이가 바로 엄비가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낳은 아들 영친왕 이은(李銀)이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거처한 방은 공사관에서 가장 안락한 방으로 내부가 르네상스풍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후에 광복 직후 옛 소련 영사관으로도 활용됐다.

이 건물은 원형이 대부분 손상됐지만 1977년 9월 역사적 의의를 감안해 사적 제253호로 지정됐다. 또한 1981년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공동 발굴로 탑의 동북쪽에서 밀실과 비밀통로가 확인됐는데 경운궁까지 연결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한 인물은 러시아인 사바틴(1860~1921)이다. 그는 조선 외교고문으로 활동 중이던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1883년 입국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전까지 20여년간 우리나라에 머물렀는데 사바틴은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사바틴은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인천해관청사(1883년), 세창양행 사택(1884), 관문각(1888,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된 경복궁내 서양식 건물) 등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또한 재미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요청으로 독립문(1896년)을 설계했으며 덕수궁안 근대 건축물인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도 그의 작품이다.

양희중 기자  techj74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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