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강원도 정선을 대표하는 농사꾼 시인의 시선집

▲신승근 ▲달아실출판사 ▲1만원

[민주신문=장윤숙 기자] 강원도 정선에 시인이 산다. 정선에 농사꾼 시인이 산다. 정선에 농사꾼이 된 시인이 산다. 눈 밝은 독자는 이미 그가 누군지 알 터. 바로 신승근 시인이다. 20세기 정선을 대표하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신승근 시인이다. 아, 아니다. 실은 정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도원桃源으로 간다. 정선의 옛 이름은 도원이다. 산 설고 물설던 새외塞外의 땅은 이제 변방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척추를 타고 내려와 소용돌이로 뭉친 단전丹田에 도원은 있다. 사람들은 도원에 이르러 복사꽃 만발한 꿈을 찾지만 보고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도원은 복사꽃을 그의 눈앞에 몇 번이고 펼쳐 보였다. 그대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만났던 그 질긴 외로움 속에서 혹은 도원을 꿈꾸던 그날부터 이미 당신은, 당신 안에 무릉의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당신이 꿈꿀 수 있는 동안은 그러므로 도원의 복사꽃은 그대 가슴속에서 언제나 핀다. 경배하라. 그대여 이 신성의 땅에 입 맞추라. 그대가 혼신으로 다가설 때, 마침내 이 땅은 그대에게 복사꽃 만발한 도원을 펼쳐 보이리니. ― 「도원으로 가는 길」 전문

이번 신승근 시인의 시선집을 보면서 제일 처음 생간나는 시가 「도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선의 옛 이름이 도원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선에 간들 그곳이 도원인 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는 모양새가 다 그 모양 아니겠는가. 보고도 못 보니, 바로 옆의 파랑새를 두고 파랑새를 찾아나서는 꼴 아니던가. 그러니 나를 다스려라. 신승근 시인의 시선집을 관통하는 가르침 중 하나 되겠다.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고, 내 마음을 닫고 있는 그것들을 먼저 덜어내고 비우라.

지난해 말, 신승근 시인께서 다시 시를 쓰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바로 전화를 넣었다. “선생님 좀 뵙고 싶은데요.” 그렇게 올해 초 신승근 시인을 만났다. 정선 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10년 넘게 시를 버리고 사셨다 했다. 다 버리고 이제 시 없이도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흙이 시고 풀이 시고 바람과 돌과 하늘이 시려니 이제 되었다 싶었는데, 믿지 않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훅,하고 시가 다시 찾아 들었다 하셨다. 선생께서는 믿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믿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면 시선집 먼저 묶으시지요!!!”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늘 한가운데 손을 넣으면 내 손이 아프다. 눈이 부시게. 이만큼 이만큼 떨어져서 너를 보지만 멀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너는 더욱 가까이 나를 흔든다. 네가 하늘이고 내가 한 뼘만 한 그늘이고 네가 까마득한 들판이고 내가 그 속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풀꽃이고. ― 「너는 믿지 않겠지만」 전문. 신승근 시선집, 『저 강물 속에 꽃이 핀다』

신승근 시인이 시를 끊고 농사에 매진한 사이 그의 보물 같은 시들은 함께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이번에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니 심해에 묻혀 있던 보물들을 백 년 만에 건져 올리는 그런 기분이다.

할머니가 시집을 오실 적에 그 집을 지키던 지킴이 구렁이가 따라왔더랍니다. 보리밭이 좍 갈라지더랍니다. 한 아름은 실히 넘고, 귀까지 달렸더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게 아니고, 시집온 한참 뒤에 할머니 친정집에 불이 났었는데, 지킴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마루 밑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 죽으니 나머지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찾아오는데, 보리밭이 마치 가르마 타듯 두 갈래로 갈라지더랍니다.
그 뒤로 우리 집은 날로 번창했답니다. 통시에 기와도 올리구요. 통시에 기와를 올린다는 것은 엄청 잘산다는 얘기거든요.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히 신화적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 소를 세는 것보다 콩 한 되를 엎어놓고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거나, 우리 집 소들의 고삐를 이어놓으면 서울까지 가고도 남는다는 둥. 하여튼 요란하였습니다. 그것이 모두 우리 집 지킴이 덕이랍니다. 거친 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때론 신화가 삶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 「신화 5」 전문

신승근 시선집, 『저 강물 속에 꽃이 핀다』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 중 가장 상단에 위치할 시집이 아닐까. 감히 그런 생각을 해본다. 2018년에 나올 그 어떤 시집도 이 시집의 무게와 깊이를 넘어서지 못할 거라고 조심스럽게 감히 예측해본다.

신승근 시인은 1952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79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이 접시에 닿고 있을 때』 『그리운 풀들』 『언젠가는 저 산의 문을 열고』 등이 있다. 오랜 교사 생활을 접고 현재 정선에서 자급자족의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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