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를 품다] 내 차로 가는 세계여행1-(19)

<프롤로그> 시동을 걸다

2015년 4월 19일, 아침 6시에 집을 나섰습니다.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둘째 아들 걱정이 앞서지만 떠나는 발길을 재촉합니다. 비가 내리는 새벽길을 달려 동해항으로 오는 동안 메시지와 전화가 운전이 어려울 만치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동안 못나게 살아온 건 아니구나 괜히 마음이 뿌듯합니다. 여비가 떨어지면 꼭 연락하라고 하신 분 수두룩합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넉넉해져 안심이 되었습니다.

빗속을 달려 약속한 10시에 겨우 강원도 동해항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페리사 담당자의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통관업무를 진행합니다. 보세 구역으로 차를 옮겨 세관 검사를 받습니다. 이틀 동안 실은 물품을 혼자서 다 내려 X-RAY검사를 받고 다시 싣느라 오랜만에 땀에 흠뻑 젖어보았습니다. 선내 화물칸으로 차를 옮긴 다음 네 바퀴를 야무지게 결박합니다. 세관원의 안내를 받아 다시 보세 구역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오후 2시. 퇴색한 유행가 가사처럼 뱃고동 길게 울리며 출항합니다. 항구에 비는 내리는데, 선창가에 서서 눈물 흘리는 이도, 손 흔드는 이도 없습니다. 아무도. 모든 사물은 제 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일에 열심히 매진할 때 가장 빛난다고 알고 살았습니다. 모든 것에는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이 세상에 운명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고생을 한 것도 운명이었고, 열심히 노력하여 그 고생을 벗어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없던 중학생이 세계 여행을 꿈꾼 것도 운명이고, 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의 날씨는 험하고 바람까지 드셉니다. 갑판에서의 별 구경은 어림도 없습니다. 떠난다고 연락도, 작별인사도 못한 곳이 많은데 아쉽게도 이 선박은 와이파이가 불통입니다. 거친 풍랑으로 흔들림이 심한 탓에 선내 욕실에서 이리 저리 뒹굴면서 힘들게 목욕을 마치니 쏟아지듯 잠이 몰려옵니다.

힘들겠지만 좋은 여행을 가겠습니다. 어렵겠지만 멋진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목숨 걸 만한 가치 있는 훌륭한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그리고 명심하겠습니다. 이 여행의 최종목적지는 ‘집’이라는 사실을!

삼겹살 만찬, 요트에서의 하룻밤

오후 늦은 시간 비에 흠뻑 젖어 베르겐(Bergen)에 도착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에서 제일 큰 도시인 베르겐에서는 특이한 숙소를 정했습니다. 수십 번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까지 온 김에 그렇게 소원했던 요트를 한 번 타보기로 작정하고 하룻밤 빌렸습니다. 선실의 주방에서 노르웨이산 삼겹살을 굽고, 한국에서 가져간 된장으로 찌개를 끓여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스물아홉 살, 선주의 큰 아들은 몇 년 전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었답니다. 다양한 언어를 섞어 의사소통을 하고 서로 묘한 인연에 탄복하며 뜻 깊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보여준 여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증’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시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사는 우리는 꿈도 꾸지 못하는 곳인데,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 젊은이는 그런 우리를 조롱하듯 너무나 쉽게 다녀왔습니다.

필자의 여권에 방문국의 스탬프가 몇 배, 몇 십 배나 많이 찍혀 있었지만 초라해졌습니다. 살짝 서글픈 기분도 들었습니다. 비자도 여권도 필요 없이 차표만 구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그날은 언제 올까요.

200만 년 동안 신들이 빚어 낸 피요르드

춥고 긴 겨울 내내 눈이 내립니다. 산 위에 눈이 점점 쌓이고 눈은 제 무게에 자꾸 눌립니다. 쌓인 눈덩이는 중력에 의해 낮은 곳으로 움직입니다. 무거운 눈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눈 아래 깔린 흙도 조금씩 깎이면서 낮은 곳으로 시나브로 이동합니다.

여름이 돼 기온이 상승하면 눈은 녹아 없어집니다. 눈과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 낸 급경사의 골짜기에 상승한 해수면이 들어와 깊고 긴 피요르드가 형성됩니다. 200만 년 이상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자연이 해낸 작업이라고 합니다.

절벽 끝에서 저 아래 해면까지 높이가 604m입니다. 200층 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수직으로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기분. 사람들이 우르르 서있는 절벽은 단 하나의 바위로 된 산입니다. 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함께 여행하는 장남과 막내는 열 살 차이가 납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 녀석들보다는 분명히 필자가 먼저 갈 겁니다. 언젠가 그 날이 오고 나서 이 둘은 필자를 어떤 아버지로 평가할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열심히 사는 게, 지금은 열심히 여행 다니는 게 답이라고 자문자답해 봅니다.

노르웨이에서 이룬 두 가지 버킷리스트

노르웨이에 입국해서 바다를 몇 번이나 건넜는지를 세어보다가 포기해 버렸습니다. 다리 위로 스무 번도 넘게 건넜고, 바다 밑 해저 터널로도 스무 번 훨씬 넘게 건넜고 배를 타고 건넌 것도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배에는 다양한 곳에서 온 다양한 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오슬로에서 모놀리트를 보는 것, 뤼세 피요르드의 절벽에 서보는 것. 노르웨이에서의 3대 버킷 리스트 중 두 가지를 해결했습니다. 지구별의 최북단 노드갑에 가서 오로라를 보는 것은 숙제로 남겨 둡니다. 당초 예정대로였다면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로 입국해 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경로가 바뀐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노드갑에서 추위에 떨며 오로라를 찍어야 할 운명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굳게 믿겠습니다.

여행 속 이야기 - 노르웨이의 ‘내 차들’

이곳은 경찰 바이크도 BMW의 ‘R1200GS’입니다. 눈에 띄는 형광색을 많이 사용하고, 슈베르트 헬멧, 등판 보호대와 팔꿈치, 어깨, 무릎 등에도 보호대가 부착된 랜딩 기어, 발목 부위까지 보호되는 바이크용 슈즈와 바이크용 전문 글러브.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는데 근무 중이라고 안 된다고 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유한 나라의 수도답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고급 올드카들이 놀랄 만큼 자주 보입니다. 올드카는 유지하는 데만도 꽤 많은 지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오래된 차일수록 부품 수급이나 도장문제 등 관리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에 많은 애정을 쏟아야 합니다.

그린에너지에 열 올리는 선진국답게 전기차도 무척 많이 눈에 뜨입니다. 길거리에서 충전중인 전기차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급속 충전기가 설치된 전용 주차장도 곳곳에 있었습니다.

중간에 들린 캠핑장 관리인의 1977년산 자랑스러운 고물차. 같은 마크가 달린 차를 탄다고, 멀리서 왔다고, 사진도 찍으며 좋은 자리 준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1977년,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상에 나온 차가 아직도 굴러다니니 참 신기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