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진흥원 소재 편지류서 발견...경술국치 부친 자결, 독립운동가 김지섭이 유서 찾아줘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자필 편지 4통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홍명희 자필 편지.

[민주신문=양희중 기자] ‘상주인 저는 특별히 보살펴 주신 은혜를 입어 관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제 장례를 치러 아픔의 눈물이 더욱 새롭습니다. 오직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는 일로 잘 지내시기 바랄 따름입니다. 나머지는 혼미하여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삼가 소(疏)의 예를 올립니다. 1910년 8월 5일 상주 홍명희 올림’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1888~1968)의 자필 편지 4통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편지류에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19일 한국국학진흥원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거주하는 풍산 김씨 집안이 기탁한 5100여 점의 편지류에서 홍명희의 편지들을 발견한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문학박사가 번역·연구해 분석해 내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김순석 박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 편지들은 22세의 홍명희가 1910년 8월부터 11월 사이 충남 금산에서 안동 풍산읍에 거주하는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지섭(1884~1928)에게 보낸 것이다.

김지섭은 일제 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 1924년 1월 5일 일본 황궁에 폭탄을 투척하며 대한남아의 의기를 보인 후 일본 지바 구치소에서 옥사했다.

충북 괴산 출신의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재직도중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비분을 못이겨 자결했다. 홍범식은 자결 직전 당시 금산재판소 통역 겸 서기였던 김지섭을 불러 상자를 준 뒤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그 후 김지섭은 상자를 열어보고 유서를 발견한 뒤 급히 홍범식에게 돌아갔지만 그때는 이미 자결한 뒤였다. 유서는 김지섭이 홍범식의 아들인 홍명희에게 전했다.

이번에 연구발표된 홍명희의 첫번째 편지는 아버지 홍범식이 자결한 후 상을 치룬 홍명희가 풍산 김씨 집안에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이다.

김순석 박사는 “벽초의 자필 편지는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돼 있던 청년 홍명희가 1927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임꺽정’을 쓰게 된 배경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집안끼리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라고 평가했다. 

벽초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세이중학(大成中學)을 졸업했다. 경술국치 직후 아버지 홍범식이 자결하자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 후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사장으로 재직 중인 1927년에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홍명희의 가장 큰 업적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장편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 林巨正’을 저술한 것이다. 1928년 조선일보에 첫 연재를 시작으로 세 차례에 걸쳐 중단됐다가 광복 직후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이 간행됐다. 

이 작품은 작가 본인이 밝혔듯이 반봉건적인 천민계층의 인물을 내세워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양식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작품 속 귀족계층의 계급적 우월성을 배격하고 천민의 활약을 당위론적 측면에서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 작가 홍명희의 계급적 의식과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식민지 현실을 봉건적인 체제에 비교해 비판적인 점은 특이할 만하다. 다양한 삽화를 처리하는 서사적 기법과 풍부한 토속어의 구사력은 조선시대 사회상과 풍속을 재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홍명희는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했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으며, 1948년 9월 북한으로 월북해 북한 공산당정권 수립을 도우면서 초대 부수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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