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열량이 높을수록 풍미가 뛰어나니 열량과 맛은 비례한다고 말이다. 기름지고 달콤한 음식이 당기도록 우리의 뇌가 설계되었으니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이로써 식도락과 슬림한 몸을 동시에 갖기 어려운 이유 중 한 가지는 설명이 된 셈이다. 

문제는 천연 상태의 자연에서 올라 온 먹거리가 아니라 인간이 복잡한 조리 과정을 거쳐 가공한 식품이다. 공산품에 불과한 천박한 먹거리를 만든 배경은 명확하다. 자연에서 올라온 먹거리 중 단맛과 기름진 맛을 동시에 지닌 것이 없으니 그것이 인간에겐 못내 아쉬웠을 게다. 돼지고기는 기름질 뿐이요, 벌꿀은 달 뿐이니 달면 기름이 없고, 기름지면 달지 않다. 돈벌이에 영악한 재주를 가진 인간이 이를 놓칠리 없어 끓는 기름에 음식을 튀긴 후 설탕을 버무려 우리 앞에 내 놓으니 우리는 이를 피해나갈 재간이 없다. 

사용한 기름 역시 자연 상태의 것이 아니라 수소를 혼합하여 경화화한 트랜스지방이다. 식품의 보존과 유통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돌연변이 물질이 탄생한 것이다. 한때 식품 회사들은 식물성 기름이라며 건강한 기름처럼 광고를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음식은 그렇다치고 인간의 끼니가 하루 3번으로 제도처럼 굳어 버린 것은 어떨까. 정해진 시간에 음식을 먹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 뿐이다. 

산업 혁명을 계기로 그전엔 낮설던 1일3식이 보편화되자 대중은 정해진 끼니를 정해진 시간에 챙겨 먹는 습관을 갖게 된다. 하루 3번 의무적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는 대중을 위해 보존과 유통이 가능하도록 첨가물에 버무려 인간의 입에 맞게 개조한 먹거리의 양산이 넘쳤다. 배가 고프든, 그렇지 않든 하루 3끼니를 꼬박 꼬박 소화기관에 밀어 넣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단거다. 

활동이 많지 않은 현대인은 자연에서 올라 온 먹거리로 하루 2번 식탁을 차리는 것으로 충분한 영양과 열량을 채울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풍요를 누리며 동시에 날씬한 몸을 갖길 원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갖가지 요상한 다이어트 방법들이 천지에 횡행하기 시작한다. 목적은 대중을 현혹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날씬해질 욕망에 사로잡힌 자의 공통점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외엔 무관심해지거나 자신의 몸을 돈과 같이 맡길 자의 실적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관심은 그 자가 얼마나 더 빨리, 더 많이 남의 살을 훔쳐내듯 빼냈는지에 달렸는데 몸에서 무엇이 빠져나가 체표면적과 체중이 줄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단기간에 남의 살 몇 십kg을 빼낸 자가 다이어트 명인이요, 빼낸 곳이 다이어트 명소다. 문제는 체중을 덜어 내려는 일반인의 노력이 근육과 조직 등 우리 몸에 유용한 제지방을 남기고 필요량 이상 존재하는 체지방만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덜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방법 여하와 관계없이 체중만 줄이면 건강과 미용상 이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저 초보적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유사 이래 명멸한 수많은 다이어트의 시작점은 단언컨대 무지다. 여기서 잠깐 열혈 다이어터였던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인상적(?) 다이어트에 대해 살펴보자. 꽃 미남 외모를 지닌 당대의 시인은 뭇 여성들에게 창백하고 마른 외모로 어필하였는데, 그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수단은 바로 식초다. 

육류나 채소 따위를 절이거나 저장할 때 사용하는 향신료가 살을 뺀다? 고유의 유기산으로 맛과 향기를 더하는 일종의 조미료가 과연 우리 몸의 중성지방과 대항할 수 있을까. 이성에 입각해 생각하면 무언가 삐걱거린다. 당시 대단한 식초 열풍은 빅토리아 여왕까지도 마시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데 현세에도 종종 애용되는 이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 다음 호에 살펴보자.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