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xabay

작가의 말
요즘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실상 지옥 같은 세상 현실이 오늘날에만 그 검은 입을 벌리고 붉은 혀를 날름거렸던 건 아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비유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쳐 남북이 삼팔선으로 분단된 이후로 대한민국에서든 저 조선인민공화국에서든 이른바 금수저들의 천국과 흙수저들의 지옥 같은 생존 현실이 계속 이어져 왔다.

이 소설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어린이·청소년 공작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8세~17세의 어린 소년들로 구성된 부대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6.25 동족상잔 전쟁을 전후해 실제로 수많은 아이들이 물색조의 허풍에 속거나 반강제적인 방법에 의해 비밀스런 부대로 끌려가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남북한 간에 공작원 대결이 가장 치열했던 1960~70년대 초엔 어린 아이들은 배제되었으나, 열대엿 살 정도의 청소년이 체격이나 민첩성 등에 의해 선발돼 성인 부대에 소속된 사례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의 존재가 이젠 은밀한 비밀이 아니며, 국가에서도 선별적으로 보상을 해주고 있다지만, 꽃다운 어린 청소년들의 활동과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구무언이다. 그 아이들은 깊디깊은 망각의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후반부에 사이비 종교단체의 해괴망측한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할 말이 별로 없다. 다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리얼하며, 진짜 종교와 사이비 종교의 관계는 진짜 정부와 사이비 정부의 관계와도 같다고 에둘러 말할 수 있을 뿐…….

2016년 초겨울
연신내에서 김영권
...............................................................................................................

제 2부 인간 소모품 

<전편 이어서>
“그래, 맹꽁이 새끼…너놈 꼬라지 보기 싫어서라도 갈 테니까 걱정 말어!” “가기 전에 죽이고 말겠다!” 두 놈은 으르렁거리며 다시 치고 박기 시작했다. 마치 우물 속 진흙탕의 개싸움 같았다.
‘만일 적군이 이 꼴을 본다면 드르륵 갈겨 버릴까, 히히 비웃을까?’ 청운은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고는 두 투견 사이에 끼어들어 우선 지랄 발광을 하며 설치는 스라소니의 목을 꽉 껴안고 졸랐다. “멈추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너 이새끼, 미쳤니? 빨리 놔라!” 스라소니는 켁켁거리면서도 울분을 못 이겨 발악을 했다.
“그래, 함께 죽자구. 선감도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청운은 나지막이 음울하게 속삭였다. 살의를 품고 씨근거리던 스라소니의 숨결과 힘줄이 서서히 풀려 갔다. “알았으니…… 제발 좀 놔 줘…… 이제 그만하자…….” “뭘 그만해, 이 더러운 쥐벼룩 같은 새끼!”
궁지에서 벗어난 개호주가 피를 흘리며 달려드는 걸 청운은 등으로 막았다. “제발 이러지들 마. 여기까지 와서 이 지랄 하려고 우리가 지옥산에서 그 생고생을 한 거야, 응? 다 죽고 우리만 남았는데 이런 개쌈이나 할 거냐구…….”
두 녀석은 구덩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말없이 헐떡거리기만 했다. 개호주의 코에선 피가 계속 흐르고, 스라소니의 삽날에 다친 손가락도 상처가 터졌는지 감아 놓은 붕대가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서로 의견이 좀 다르다고…그동안 생사를 함께 한 동지애도 잊고…상대의 결점만 찢어진 생살처럼 드러내 마구 비난한다면…… 그 누군들 고름이 흐르는 썩은 흠집을 새살로 바꿀 수 있을까.’
청운은 그런 상념을 입 밖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혼자 속으로 삭이며 한숨을 쉬었다. ‘혈기 왕성한 동무들아, 우린 우리가 잘 모르는 자들이 갈라놓은 철조망 속에 갇혀 서로 싸워서는 한갓 꼭두각시가 될 뿐일 것만 같아. 그 많은 아이들이 지옥훈련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건…결국엔 동족 간의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이루는 데 바쳐져야 하지 않을까?
우린 작은 씨앗이야. 윗동네에서 지옥훈련을 받는 청소년들도 그렇고…… 우린 분단과 전쟁을 넘어 결국엔 민족 통일의 씨앗이 되어야…… 조그마한 생명의 의미라도 갖지 않을까 싶어.’ 청운은 배낭에서 꺼낸 붕대로 그들의 코를 막아 주고 손가락을 싸매 주면서 생각했다.

어린 방랑자

어둠이 내리자 그들은 비트에서 기어나와 다시 험한 산을 타기 시작했다. 길이 나지 않은 미지의 숲을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목숨을 건 행군이기에 셋은 좀 전의 싸움 따윈 깡그리 잊고 정신을 집중해 허덕허덕 목표 지점으로 근접해 갔다.
그들의 임무는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북한 군사 시설물 등에 대한 정보수집이었지만, 항공사진엔 전혀 나타나지 않은 지하 시설이나 은폐된 천연동굴에 대한 파악도 추가돼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이면 멈춰 살펴보곤 했다.
새벽녘에야 그들은 목표 지점이라고 짐작되는 산등성이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가까이서 쾅쾅 포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왔다. 셋은 땅강아지처럼 납작 엎드렸다. “괜찮아?” “응.” “그럼 뭐지?”
청운은 좀더 위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별다른 이상이 없자 둘도 조심스레 따라왔다. 그 순간 다시 포탄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땅속의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셋은 다시 낙엽 속에 머리를 박았다.
청운이 먼저 눈을 들어 산자락을 살폈다. 어슴푸레한 속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서서 걷는 개미 같은…… 청운은 망원경을 꺼내 눈에 바짝 갖다댔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벌레나 외계인 같기도 했지만 여명이 점점 밝아올수록 남한의 농촌이나 공사판에서 늘 보던 노동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마 산중턱 어딘가에 발파 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뭘까?” “혹시 땅굴을 파는 게 아닐까.” “멍청하긴…… 저기서 왜 땅굴을 파겠냐. 두더지 새끼들도 아니고 말야.” “땅굴을 꼭 서울 쪽으로만 파야 한다는 무슨 헌법이나 법률이 있냐? 핵실험을 하기 위한 기지를 짓고 있을 수도 있잖아.”
“뭐? 그 정도로 대단해 보이진 않는데…” “원래 큰 야망일수록 사소한 척 숨기는 법이지. 훤한 대낮 놔두고 왜 어스름 속에서 저러고 있을까 싶잖아?” “뭔가 수상하니까 우릴 보냈겠지 뭐.” “그럼 어떡하지?”
셋은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잠시 후 조장인 스라소니가 말했다. “일단 청운이 넌 전경 스케치부터 해. 어차피 사진 촬영은 날이 밝을 때 좀더 근접해서 해얄 테니까, 우린 비트부터 파자.” “알았어.”
청운은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손엔 연필과 수첩을 든 채 큰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어릴 때 엄마가 사서 예쁘게 깎아 주던 향나무 냄새 은은한 그 연필이 아니었다. 글자가 흐릿할 때면 침을 살짝 묻혀 쓰면 엄마의 속눈썹처럼 살짝 짙어지던 그 연필이 아니라 미국제 고급 샤프펜슬이었다.
처음에 청운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험악한 곳으로 가는데, 왜 좋은 필기구를 놔두고 굳이 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연필을 사용할까?’ 하고 궁금했다. 교관은 ‘야전에선 단순한 게 가장 좋다. 연필은 보기보단 상당히 이지적이고 이성적이다. 차가운 북풍이 분다고 얼어붙지 않고 따스한 남풍이 분다고 풀어져 번지지도 않는다. 북극의 차가운 물속에 빠져도 얼지 않고, 뜨거운 사막에서도 말라 버리지 않는다. 즉, 악조건에서도 쓸 수가 있고 읽을 수도 있는 건 현재로선 연필이 최고다.’라고 설명했다.
청운은 샤프펜슬로 구도를 잡아 나갔다. 그 스케치는 멋진 풍경화나 수채화를 그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군사적인 필요가 중요하기 때문에 명료한 선과 점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그려 나갔다. 전문 화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묘사력이 괜찮았다.
그는 멀리 보이는 산마을 풍경도 그렸다. 아슴푸레한 대로 마치 어릴 때 잃어버린 고향이라도 회상하는 듯 정성을 들였다. 불현듯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청운은 급히 엎드린 채 동향을 살폈다. 흐릿하게 비치던 인공조명이 슥 꺼졌다. 폭파음도 드릴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사람 목소리는 원래부터 들려오지 않았으므로 이젠 찬바람에 휩쓸리는 낙엽 소리만 귓가를 스칠 뿐 적막강산이었다. 얼마 후엔 개미만한 사람들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야릇한 정적만 감돌았다. 청운은 즉시 구덩이를 파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갔다.
“왜?” 스라소니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어. 무슨 일일까?”
“아침밥 먹으러 간 것 아닐까. 먹어야 일도 할 테니까.” 개호주가 삽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스라소니는 훌쩍 뛰어 구덩이 밖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치 사냥하려는 사자처럼 상체를 잔뜩 낮춘 채 청운을 앞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뱀처럼 배를 땅에 대곤 수풀 속을 기어 전망이 좋은 지점에 자리잡았다. 스라소니는 숨도 쉬지 않고 산기슭 쪽을 내려다보았다.
“음, 비 내리기 전에 개미떼가 사라진 듯 조용하군. 단순히 밥 먹고 쉬러 간 걸까, 아니면 야간작업을 마치고 잠적한 걸까?” “으스스하군. 하지만 어차피 밤에 촬영할 순 없으니까 지금 기회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청운이 대꾸했다. “갈등 생기는군. 위장술법인지도 모르고…” “어쨌든 빨리 선택해야 돼. 저들이 다시 나오면 최소한 저녁때까진 기다려야 할 테니까.” “점심때도 있고 하니 좀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경우의 수를 계산한 후에 땅거미가 내릴 무렵 선택하면 어떨까?”
“기회가 아까워서 그래. 우선 내가 한번 접근해 볼게.” “까딱 잘못해 발각되면 모두 죽어. 너무 근접하지 말고 슬쩍 정찰하곤 급히 돌아오라구.” “응, 알았어.”
청운은 대꾸하곤 수풀 속을 기어 내려갔다. 새벽이슬이 목줄기에 닿아 선뜻한 느낌을 주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나무숲은 점점 옅어졌다. 청운은 큰 바위 뒤에 숨은 채 아래쪽을 찬찬히 살폈다.
‘음, 여전히 쥐 죽은 듯 조용하군. 그런데 저건……?’ 위쪽에선 보이지 않았었지만 청운은 옆으로 슬쩍 에돌아 내려갔기 때문에 산기슭에 바짝 붙여 지은 바라크를 포착할 수가 있었다. 두 개의 장승 같은 것이 조금씩 움직이는 듯해 망원경으로 보았더니 총을 어깨에 건 두 명의 보초병이었다.
‘저 바라크 안에서 지금 밥을 먹거나 쉬고 있겠군. 그런데 민간인들이 일하는 작업장에 군바리가 지킨다니…… 혹시 죄인들이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상황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노동자들 중에서도 몇 명 외엔 다 괴로운 표정이었던 것 같아.’
청운은 상의 주머니에서 수첩과 샤프펜슬을 꺼내 스케치한 후 좀더 비스듬히 내려가 보았다. 도대체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보이길 바라면서. 하지만 황토 흙이 드러난 작업장 터엔 목재와 돌더미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작업 목표와 진행 상황을 보려면 더 내려가야 했지만 아래쪽엔 벌목이 돼 버려 몸을 숨길 데가 없었다.
청운은 수동 카메라로 몇 장면을 찍곤 곧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혼자서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때?” 스라소니가 물었다.
“보초가 지키고 있어. 최소한 두 명. 설령 노동자들이 아침까지 안 나오더라도 그들이 문제야.” “그럼 저녁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는 것 아냐?” 개호주가 반문했다. “아마 비슷한 상황이겠지.”
“흠, 어떡하지.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올라 버릴 텐데…… 과연 저 여명의 빛이 좋을까, 아니면 나중에 석양빛을 이용하는 게 더 나을까?” 스라소니가 심란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적진 침투 때 보초가 교대할 무렵의 어스름녘을 이용하는 건 착시현상으로 인한 일시적인 눈의 혼돈 때문이란 조교의 안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스라소니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가락 관절을 하나씩 눌러 딱딱 소리를 연이어 내더니, 다른 사람이 의견을 밝히기도 전에 스스로 말을 꺼냈다. “어차피 우린 내일 자정에 아군과 접선하기로 돼 있으니 여기서 하루를 지내며 상황을 확실히 살피자. 괜히 서둘렀다가 참변이라도 당하면 무척 후회될 테니까.”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기로 했다. 셋은 비트 속에 은신한 채 어떤 방법이 적절할지 의논을 하는 한편 수시로 한 명씩 교대로 나가 아래쪽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망을 보았다.
청운은 다시 아까 그 바위 뒤에 엎드려 전경을 살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이름 모를 하얀 풀꽃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먼 산등성이 위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며 산야에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같은 것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더만 햇빛도 그렇군. 어쩐지 군사분계선의 남쪽과는 다른 느낌이야. 여기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땅이라서 그런가? 조선이란 ‘아침의 신선한 빛’이라고 검정고시 책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리고 한국도 사실은 ‘환한 하나의 나라’ 라는 뜻이라던데…….’
그때였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일꾼들이 몰려나와서 다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좀더 지켜보던 청운은 급히 아지트로 되돌아갔다.
“어때?” “다시 일개미들이 나오고 있어.” “잠도 안 자고 작업만 한다구? 그럼 혹시 여긴 강제노동수용소일까?” 스라소니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교대로 일할 수도 있지 뭘.”
개호주가 대꾸했다. “그런 기미가 없었잖아.”
“하나의 바라크 속에서 작업조와 휴식조가 계속 돌고 돌 수도 있겠지.” “그럼 강제 노동하는 것을 보고 오라고 우릴 보냈다는 거야? 씨팔!” “흐흐, 노동의 목적이 중요하겠지.”
“씨팔!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잖아.” 스라소니가 씹어뱉었다.
“그래, 니 말대로 기회를 최대한 살려 대가릴 굴려 보다가 저녁노을이 질 무렵에 결행하자구.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진 않지.” “그게 뭔데?” “눈높이를 현실에 맞추고 대충 가능한 장면만 찍어 가는 거야. 우리가 무슨 대단히 위대한 일을 한답시구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임무는 임문데…… 어떡해서라도 목표 장면을 찍어 가야지.” 청운이 한마디 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방식으론 안 돼. 양동작전이라도 펼쳐야 작은 가능성이나마 있을 거야.”
개호주가 속삭였다. “양동작전?” 스라소니가 반문했다.
“그래. 한 방향으로만 내려가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해. 그러니 세 방향에서 접근해 경우의 수를 늘리자는 얘기지. 희생양이 필요할지도 몰라.”
“뭐?” “놀라긴…….” 개호주는 스라소니의 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개소리 말고 구체적으로 얘기해!” 스라소니가 잡쳐댔다. “희생양이라고 꼭 죽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편하게 들어 봐.” “됐어. 어차피 목숨 걸고 올라왔는데 뭔 사설이 그리 길어. 그래서?”
“흠, 교관님께서도 우리 셋이 일심동체가 되어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면 성공이라 하셨지. 흐흐, 그러니 나라고 하는 이기적인 존재를 버리고 조국을 위해…….” 야, 지겨운 개소리 그만 지껄이고 제발 요점만 좀 말해.” “음, 죽을지도 모르는데 서둘 필욘 없잖아. 우선 목표지점을 향해 곧장 내려가려고 애쓰기 보단 좌우로 슬쩍 돌아 멀찍이서 양 날개를 편 형국으로 두 사람이 각각 접근하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산을 저쪽으로 쭉 에돌아가 다시 목표물을 향해 접근하되, 만일 발각될 경우엔 숨기보다는 오히려 천천히 걸어 내려가서 항복하는 척 저들의 주목을 끌고 시간을 지체시켜야 해. 미친 놈처럼 요란스럽게 쑈를 해야 한단 말이야.”
“누가 그 배역을 맡아?” 스라소니가 개호주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차피 위험은 비슷해. 또 우린 운명공동체고…… 자원을 하든 제비를 뽑든 정해야겠지.” 개호주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제안을 한 네가 맡으면 어때? 적격일 것 같은데…….” 개호주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pixabay

생명을 건 선택

위험은 비슷하다지만, 그 역할을 맡았다가 만일 적의 수중에 잡히는 몸이 된다면 그의 삶은 큰 위기에 쳐하게 될 터였다. 인민무력부의 정보기관이나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설령 반병신이 돼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아오지 강제수용소에 갇혀 신음하며, 평생 남쪽의 조국과 아지랑이 피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육훈련 시간에 교관은 애써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적의 포로가 되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게 됨을 명심하라. 그들 자신이 야수보다 더 잔혹하다. 달콤한 꾐수에 빠져 넘어가고 싶겠지만, 그 흡혈귀들은 여러분의 뇌수에서 정보를 빨아먹은 다음에 작두로 온몸을 썰어 버린다. 빨갱이 야수들은 누구든 배반자를 가장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단 유사시엔 지체없이 독약 앰풀을 깨물고 동백꽃처럼 붉은 단심을 품은 채 산화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생명을 건 선택의 문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럼 제비뽑길 하지. 아냐, 그냥 가위바위보로 정하면 되겠네.” 청운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개호주가 말했다.
“아냐, 역시 먼저 제안한 내가 미치광이 배우 역을 맡는 게 낫겠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양 날개를 맡은 너희들 중에서 누가 나서야 할 수도 있어. 내가 꼬리 부분이지만 만일의 경우엔 휙 돌아서 부리가 되어 목표물을 찍을 수도 있단 말이지. 아무튼 상황을 끝까지 주시하되, 불가피하게 위장 할복을 해야만 할 땐 우선 카메라 같은 건 풀숲에 던져 숨겨 버려야 해.” “물론 그래야겠지.” 스라소니가 진지한 어조로 동의했다.
“점심때까지 내가 망보고 있을 테니까 먼저들 좀 자둬.” 청운은 말한 후 아지트를 벗어나 바위틈에 엎드렸다. 머리 위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청아한 목청으로 인간세를 비웃는 듯 지저귀었다.
산중이라 땅거미가 일찍 내렸다. 서녘 하늘엔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을 먹고 난 후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 지니곤 비트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수풀 속에 바짝 엎드렸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꾸물꾸물 일개미처럼 움직이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쓰벌, 한 시간 내로 임무를 마쳐야만 자정까지 약속된 접선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접선 시간을 못 지키면 우린 대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야. 며칠 후 겨우 살아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되니까 서둘러야 해. 저 석양빛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사진을 찍지 못하면 말짱 꽝이잖냐 말야.”
스라소니가 성마른 목소리로 씨부렁거렸다. “일단 흩어져 각자의 목표 지점으로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기다리자구.” 개호주가 제안했다. “그게 낫겠군. 그럼…….”
셋은 손을 포개 잡고 눈빛을 한번 교환한 뒤 급히 움직여 나갔다. 스라소니는 왼쪽 산기슭을 향해 내려가고 청운과 개호주는 오른쪽으로 에돌아 내렸다. 중턱쯤에서 헤어질 때 개호주가 청운의 어깨를 슬쩍 두드리곤 미소 지었다. “잘 가.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작가 김영권
진주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으며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다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仙甘島 수용소의 비밀 보리울의 달 등이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취재해서 르포 시장의 하루 「보통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현재는 지옥극장 시리즈 제3탄 몽키하우스를 집필중이이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진실을 찾아 드라마틱하게 소설화할 계획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