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월트 디즈니 공식 홈페이지

1923년 - 월트 디즈니 회사 설립
월트 디즈니와 그의 형제 로이 디즈니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The Walt Disney Company)’를 설립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미국의 거대한 대중 매체 산업 관련 그룹 집단으로, 오늘날까지 가장 큰 헐리우드 스튜디오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본사와 주요 제작 시설은 캘리포티아 주 버뱅크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 위치해 있다.

이후 1928년 미키 마우스를 공식 마스코트로 지정했으며, 1983년 애니메이션 중심에서 가족,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로 회사를 확장하고 가족 중심의 엔터테인먼트 채널을 표방하는 디즈니 채널을 개국해 TV 방송 시대를 열었다.

1991년 5월부터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에 포함됐으며, 마블 엔터테인먼트, 루카스필름,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 월트 디즈니 픽처스, 터치스톤 픽처스, 할리우드 픽처스, 미라맥스, 디멘션 필름스 등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사업과 디즈니 채널, ABC, ESPN, 디즈니 주니어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을 제작 및 송출하는 방송 사업, 디즈니랜드를 비롯한 11개의 테마 파크 사업 등을 소유 및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우리나라 신생 게임 엉ㅂ체인 스튜디오EX를 인수하면서 루카스필름의 게임 사업본부 루카스아츠와 함께 게임시장 진출도 선언했다.

한때 악역의 목소리는 미국의 소수인종인 히스패닉이나 흑인 계통의 억양이 많고, 성의식은 기존 여성의 순종적이며, 아름답고,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관념을 유지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1990년대부터 여성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점진적으로 바꿔 라푼젤이나 겨울왕국, 말레피센트같은 작품에서는 차별적인 요소를 없앴으며, 주토피아에서는 노골적으로 차별에 반대했다.

또한 논란이 발생할 위험이 있는 노골적인 특정 국가색이나 종교적, 정치적인 요소 역시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각 나라들의 이해관계에도 철저하다. 빅 히어로에서는 한국 개봉판의 일본식 인명과 일본어 간판들도 전부 수정하고, 욱일기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나온 부분을 곧바로 수정하기도 했다.

사진=사료로배우는민주화운동

1979년 - 부마민주항쟁
부산과 마산(현 창원)의 첫 글자를 딴 부마민주항쟁은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이들 지역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한 후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됐다. 이어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까지 시위가 확산됐다.

시위 발생 전인 같은 해 5월 3일 ‘민주회복’을 목표로 한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자 박정희는 김영삼 의원직 제명안을 변칙으로 국회를 통과시켜 의원직을 박탈시키는 등 일련의 사건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박정희 유신 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해 군을 출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부산에서만 1058명이 연행되고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사태는 단시간 제압됐지만, 10월 26일 김재규가 권총으로 박정희를 살해하면서 박정희의 유신체제도 종말을 맞는다.

부마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을 둘러싸고 민주화운동의 성격, 지도세력 등 여러 평가들이 있으나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1981년 - 88올림픽고속도로 완공
88올림픽고속도로는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을 기점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을 종점으로 하는 대한민국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다. 1973년 고서-담양 구간이 호남고속도로 담양선으로 개통하고, 옥포와 담양 구간이 1981년 착동해 1984년에 88올릭픽고속도로라는 명칭으로 개통했다. 이후 2015년 12월 전 구간을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현재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명칭을 바꿨다.

확장 개통되기 전까지 담양 나들목에서 동고령 나들목까지 구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왕복 2차로 고속도로 구간으로 중간에 추월차로가 가끔 등장하며, 뒷차에게 먼저 가도록 양보하기 위한 비상주차대도 많았다. 도로의 제한속도는 80km/h였으며, 급커브 구간이 굉장히 많고 고개의 구배가 심했으며, 중앙분리대가 없는 유일한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대구와 광주 간의 주행시간은 5시간에서 2시간 30분(건설당시 기준)으로 단축됐다. 특히 험준한 산맥으로 갈라져 있던 영남과 호남 지방을 연결해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기술·자본·자재로 건설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낙후된 남부내륙지방의 지역사회개발과 주민소득 증대, 주변 관광자원 개발 촉진 및 이용도 증대도 불러왔다.

하지만 왕복 2차선에 도로폭이 좁고 중앙분리대가 없어 사망 사고율이 대략 30~40%정도로 다른 고속도로에 비해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특히 1990년에서 2003년까지 14년 간 전국 고속도로 중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2000년에는 교통사고 치사율이 43%에 달해 다른 고속도로의 4배 이상 수치를 기록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죽음의 고속도로’ 또는 ‘44내림픽저속도로’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따라 도로공사는 중앙선 전 구간을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시공해 중앙선 침범사고를 원천 봉쇄하는 한편, 굴곡이 심한 급커브 구간을 대규모 선형공사로 직선화하는 등 고속도로 전 구간을 왕복 4차로로 확장 개통했다. 또 5곳에 불과하던 휴게시설도 휴게소 8곳, 졸음쉼터 4곳으로 늘려 고속도로 운전자의 휴식 공간도 대폭 확대했다.

한편 확장 개통 후 1년 동안 사망 사고가 1건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교통량도 30%이상 증가해 동서화합의 가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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