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거울 앞에 서는 것이 두렵다. 단지 서는 게 두렵다기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즉 늘어나는 흰머리에 주름진 내 모습을 보는 게 두려운 것이다. 거울뿐 아니라 길에서 지인을 만나도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기가 부담스럽다. 왜 빤히 상대의 얼굴을 응시하기가 쑥스러워졌을까? 뭔가 자신감의 결여다.

그러나 내가 나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의 모습을 사랑할 것인가? 장년의 남성이 이럴진대 미용 민감계층이 자신의 외모를 부정적 시각 없이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최고다.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뻔뻔하게 직시하는 한 해가 되길 빌며 벽두를 연다. 연초의 계획은 1900년대든, 2000년대든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 여전히 남성들은 술, 담배를 줄이거나 끊고, 여성들은 체중계의 눈금을 내리려 할 것이다.

금연도, 다이어트도 굉장히 실천하기 쉬운 결심에 속한다. 수없이 끊거나, 되 피거나, 줄이거나 늘렸었기 때문이다. 갱년기로 접어드는 필자의 아내가 얼마 전 아침에 드디어 최고 몸무게를 기록했다며 투덜거렸다.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필자는 기다렸다는 듯 “사필귀정”이니 “며칠 후에 또 갱신할 것” 등등의 말로 아내의 속을 긁었다. 여기까지는 약과다. 결정적으로 아내를 부글부글 끓게 만든 말은 “곧 내 몸무게와 같아지겠네?”였다. 끓는 불에 기름 붓는 격으로 말라깽이 막내 녀석은 20cm나 작은 엄마가 체중은 자기보다 무겁다며 낄낄거린다. 약이 잔뜩 오른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오늘부터 더 먹겠다”였다. 좀 더 비아냥거리고 싶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내게 아내는 “연말까지”라는 단서를 슬그머니 갖다 붙이며 한 걸음 물러난다.

각종 모임과 술, 그리고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다반사로 넘치는 사람(관계)과 복잡하게 얽힌 많은 일들, 그리고 음식의 상관을 끊을 수는 없을까? 누구를 만날 일이 결국엔 술이든, 음식이든 먹어야 하는 행사가 된다. 오전 10시나 오후 3시경에 차나 한잔 하자면 우리의 정서와 안 맞아 야속한 느낌이다. 음식의 종류와 식당의 격을 따질 일 없이 차나 한잔하고 헤어지면 딱 좋겠는데 말이다.

야속하게 들리는 독자도 계시겠지만, 체중관리에 실패하는 대부분 사람은 핑계가 넘친다. 대표적인 변명은 오늘 혹은 내일부터 끊겠다 등 시한을 상정하는 경우다. 대부분 짧게 시한을 정함으로 비장한 각오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려 하지만 스스로 정한 약속이라 구속력은 크지 않다. 대상 탓을 하는 핑계도 대표적 변명 중 하나다. 대상은 인적 대상, 각종 모임 및 이슈, 날씨 등 매우 다양한 편이라 찾기 쉽다. 친구와 다툼이 있거나, 성적이 우수해도 술이나 음식은 자연스레 그 옆에 동참한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라 관대한 특성이 있는데 거기에 핑계까지 가세하니 온통 세상은 먹을 일뿐이다.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연일 떠들어 대는 미디어도 소비하지 않으면 소외된다는 의식을 우리가 갖도록 부추긴다. 핑계에 불과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숙명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원인은 간과한 채, 합당한 이유 없는 핑계를 찾아 나와 내 주위를 속이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다. 자! 이제 비만과 다이어트에 국한해서 결론을 내려보자. 다이어트 박창희는 이 공간을 빌어 “비만은 핑계라는 무대에서 춤춘다(2017)”는 격언을 남기고자 한다.

우리의 삶은 늘 분주하고 고단하다. 제대로 된 영양도, 휴식도, 운동도 갖지 못한 채 지출은 늘고 그에 비례해 체중도 불어난다. 체중을 관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이면에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것들이 있고 우리는 그 달콤함을 이기지 못한 채 많은 핑계를 대며 살아간다. 결국, 체중은 핑계를 먹고 늘어난다. 그러므로 비만은 핑계라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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