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한글교육문화콘텐츠협동조합 이사장

‘아직 세계문자박물관의 개념이나 성격조차 모호한 단계’라는 우려의 목소리 속에 정부는 2020년 인천송도국제자유도시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건립키로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라 호평을 받는 ‘한글’을 가진 우리로써 국립세계문자박물관과 같은 기념비적 건물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문자 종주국으로써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업 취지에서 밝힌 대로 「문자의 창제원리, 문자체계의 발전 그리고 문자와 함께 이루어진 사회 변화의 역사 등은 인류 문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주요한 단서」들이다. 따라서 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함으로써 통찰력을 기르는 교육적 기회와 자산으로써의 가치, 문화국민으로써의 자긍심 고양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박제된 과거의 유물만을 모아놓을 필요는 없다. 박물관이야말로 미래를 지향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므로 박물관에서는 교육과 연구와 체험과 교류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앞서 건립된 한글박물관을 살펴보아야 하며 또 우리 한글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글박물관의 운영이 원활하다면 그 경험이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운영에도 유효할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늠하여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물관은 그 속에 담고 있는 콘텐츠가 중요하다. 그리고 콘텐츠의 적정성 여부는 방문객의 발길로 확인된다.

진정어린 콘텐츠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차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콘텐츠의 진정성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글 박물관의 운영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한글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너무 미흡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손’을 ‘손(ㅅ+ㅗ+ㄴ)’으로 쓰는 우리가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손’에 대한 정의를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손’을 ‘손’이라 부르고 쓰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는데 우리는 ‘손’을 ‘ㅅ+ㅗ+ㄴ’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한글학자들은 ‘손’을 ‘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글학자들도 알지 못하니 국민들은 더욱 알 수가 없다. ‘손’을 모르니 ‘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손해’, ‘겸손’ 등의 의미도 알 수가 없다. ‘손’을 모르고 발, 눈. 코, 귀, 입, 해, 달, 별 등도 알 수가 없고 모두가 모르니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손’의 뜻이 무엇인지 ‘발’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글학자라면 ‘이 모양의 글자는 왜 이런 소리와 어떤 의미를 가질까?’라고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맨 처음 ‘손’을 ‘ㅅ+ㅗ+ㄴ’이라 썼던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소리나는 대로 그렇게 불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언가 한글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는데 ‘한자는 뜻글자, 한글은 소리글자’와 같은 정체불명의 거짓 정보도 문제 중의 하나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문자는 뜻글자이며 동시에 소리글자다. 만일 이 원칙이 무시되면 그것은 이미 문자가 아니다. 그림과 문자의 구분은 ‘소리’에 있다. 그림이 소리(音價)와 연결되면 문자가 되는 것이며 소리와 연결되지 못하면 그냥 그림에 머물게 되는 것이고 그림은 또 그림 나름의 뜻을 갖게 되는 것처럼 모든 소리와 모양은 뜻과 연결될 때 비로소 고유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 한글은 뜻(의미)을 ‘소리’로 표시하기에 뛰어난 역량을 가진 문자이고 한자는 ‘모양’으로 표현하는 문자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따라서 ‘소리’와 ‘모양’ 이 둘의 장점을 잘 활용하면 비로소 어떤 문자가 지닌 온전한 하나의 뜻을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자의 연구가 깊어지면 한자나 한글이나 그 기원이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글의 기초인 소위 ‘자음’, ‘모음’의 요소들이 모두 한자의 기초요소와 동일하다.

한글에 자음 모음의 24자(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ㅣㅡㅏㅓㅓㅕㅗㅛㅜㅠ, 혹은 28자)가 있듯이 한자에도 기초중의 기초가 되는 14자(丶,丨,一,丿,乀,○□△,一二三, 丶冫氵)가 있다.

그리고 이들 기초 14자 속에 한글의 자모 28자가 만들어지는 기초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한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한글의 자음 모음 각각의 의미와 소리를 회복해낼 수 있으며 이 정보를 활용하면 우리의 위대한 한글의 실체가 드러난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자의 음가는 현재 한국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한국말이라는 것이다.

‘가’로 소리 나는 한자(家,可,加,價 등)는 ‘가다’가 기본 의미이고 ‘나’는 ‘나다’가 기본이며 ‘다(多, 茶)’는 ‘많다’, ‘전부’의 의미이고 ‘서’로 소리 나는 한자(西, 書, 恕 등)는 ‘서다’가 기본 의미이다. ‘여’로 소리나는 한자(女,旅,與 등)는 ‘여기’ 즉 ‘중심’의 의미를 가지며 ‘토(土,吐 등)’의 음가는 ‘토하다’, ‘흠(欠, 欽 등)’의 음가는 ‘흠집’, ‘결함’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한자 속에 한글이 있고 한글을 위주로 한자를 보면 놀라운 한자의 세계가 환하게 펼쳐진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적인 문자라는 평에 부응하려면 우리말로 표현되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그 뜻(의미)을 알아야 하고 또 알 수 있는 것이 우리 한글의 자랑이다. 한글을 만든 우리 선조들은 치밀하게 짜여진 이론의 토대 위에 하나씩 하나씩 그물코를 꿰어가듯 우리말을 문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자를 새로 보아야 하고 이 지식을 토대로 한글을 또 다시 보아야 한다. 한자와 한글에 대한 저간의 거짓을 걷어내고 실체를 들여다보면 한글은 한자의 생명이고 한자는 한글의 뜻풀이사전이다.

한자는 한글이 필요하고 한글은 한자가 필요하다. 이 둘은 이미 5천 년 전에 서로 남매로 태어났는데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 헤어졌다가 5천 년 만에 만난 비운의 남매와 같다.

우리 한글이 살려면 한자와 손을 잡아야 하고 한자가 한글을 만나면 우리 선조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성통공완 재세이화) 홍익(弘益)의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그 실체를 알 수가 있게 된다.

사실 우리는 고대로부터 한자와 한글, 두 개의 문자를 사용해왔다. 두 개의 문자의 의미를 바로 알려면 지구상에서 95%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자기 문자가 없어서 외국어를 빌어다가 자기 말을 표기하고 의사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자기 의사를 곧바로 자기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는 스마트폰에서 몇 단계의 문자 변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외국인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두 개의 문자는 지구상에서 ‘5%에 해당하는 우수한 문화민족’이라는 징표와도 같다. 이 중 ‘한자’는 동양의 고대 역사와 문화와 철학을 다 담고 있을 만큼 문명사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막대하고 영향력 또한 크며 ‘한글’은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에 토대를 둔 것으로 우리의 실용 문자이다.

이처럼 문자에 관한한 세계역사상 빼어난 문화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한글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편견과 오해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한글은 우리글, 한자는 중국글, 한글 사용은 애국이며 국어순화로 통하고 한자는 외국 글자이므로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 등으로 두 문자간의 갈등이 날로 깊어지는 추세다.

1948년 제정된 「한글전용법」도 갈등을 심화시켰다. 「한글전용법」이란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해야한다’는 법률이다. 정부에서 법률로 모든 공문서를 한글로 작성하도록 한 것은 일견 한자를 모르는 일반 국민들을 위한 필요하고도 가능한 조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법률이 마치 ‘한자를 사용하지 말자’는 취지로 비춰져 우리 문자 생활 전반에서 외국 문자인 한자를 추방하자는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은 2005년에 폐지(2005. 1. 27. 법률제7366호)되었음에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 여전히 유령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백보 양보하여 ‘한글은 우리글’이고 ‘한자는 중국글’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자를 이용해서 생활한 것이 수 천 년에 이른다. 여기에 비해 한글은 1445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만 사용하는 세대가 대거 등장한다면 우리 역사와 전통의 단절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이 시대 지식인, 학자들이라면 우리의 어문정책이 미래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에 미칠 영향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발언해야한다.

한자와 한글 이 둘의 관계를 바로 알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우리 문자 종주국의 위상을 세계에 비추는 정말 자랑스러운 인류문명의 금자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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