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조사 국외반출 문화재 총 20여개국 7만 6,000점
日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의 한 서려

현재 일본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 서고에 보관되어있는 '몽유도원도'

[민주신문=양희중 기자]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병인양요, 일제 강점기, 미군정, 6·25 전쟁 등은 한민족이 겪은 전쟁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또한 고유한 5000년 역사 수탈의 장이요, 문화의 약탈의 격전장이기도 했다. 

사회적 혼란기에 유출된 우리의 국보나 보물급에 해당하는 우수한 문화재는 지금도 먼 타국 어딘가에서 창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거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전쟁 전리품으로 전시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서글프게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문화재청 조사에 의하면 국외반출 문화재는 총 20여개국 7만6,000점 정도다. 일본에 3만4,157점, 미국 1만6,812점, 영국 6,610점, 독일 5,289점, 러시아 3,554점, 프랑스 1,960점, 중국 1,434점 등으로 집계되고 있다

새로 파악되는 것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해마다 이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우리와 교류가 많았던 나라이거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문화재가 반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국외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확인 작업을 벌이면 새로 추가되는 반출문화재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화재 환수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재는 이미 그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문화재로 되어 있는 경우가 다수이다. 소유권이 이미 그 나라나 개인에게 속해 있다는 점이다. 

미국 같은 경우는 자기들이 불법으로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입증되면 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것마저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반출경로를 추적해 그것이 불법부당하게 유출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는 기증을 받아 되돌려올 수도 있다. 

매우 제한적이고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에 있어서는 기간을 정해 문화재를 대여해 온다. 소유권은 그 나라에 두면서 문화재는 돌아오게 하는 방식이다. 

또 하나의 현실적 방안은 구매를 해서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도 만만치 않다. 문화재는 반출된 곳이나 소유한 쪽에서나 어느 쪽에서도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가 수반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협상이나 대화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경우다. 문화재를 보여주지도 않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면 다른 방도가 없다. 

얼마 전 6.25 전쟁 때 미국으로 불법 반출되어 도난당한 현종어보와 문정왕후어보 환수가 이루어졌다. 정부와 국민의 끝없는 관심이 이루어낸 결실이다. 국민과 정부가 꾸준하게 준비하고 관심을 둔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라는 좋은 예이다.

현재 타국 어디에선가 숨죽이고 있는 우수한 우리 문화재의 가치는 무엇인지 지금 어디에서 어떠한 현실을 겪고 있는지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 할때다.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의 꿈 ‘몽유도원도’

2009년 10월 7일 밤 10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하루 1만4000여명이 몽유도원도를 찾았고, 개막 이후 총 6만1123명이 관람했던 ‘몽유도원도’는 조선전기 최고 걸작 그림이 해외로 반출돼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는 안타까움과 짧은 전시 일정, 그리고 ‘이번 아니면 평생 못 볼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빚어낸 전시였다.

9일간의 고국 나들이를 끝낸 그림은 이날 밤 포장돼 2009년 10월 8일 오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국내전시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소장자인 일본 덴리대 중앙 도서관은 상설 전시도 없고 대여도 거의 하지 않는다. 

덴리대는 2009년 당시 몽유도원도를 빌려주면서 ‘더 이상의 전시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일반인이 볼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아무리 귀한 유물이라도 수장고 속에 모셔만 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의 찬문

왜 일본의 덴리대는 자신들의 문화재도 아닌 우리의 문화재를 자신 개인의 소유인 마냥 유감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매우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는 1447년 세종29년에 제작되었다.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에서 사육신의 한명인 박팽년과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양식도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특징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세계는 부감법(俯瞰法)을 구사했다.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후에 집현전 대학사에서 사육신이된 성삼문, 박팽년의 글과 수양대군측에서 계유정란의 주측인 신숙주의 글도 보인다.

그림과 그들의 시문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이들 시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품으로, 그 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5대 왕이었던 문종 사후 어린조카였던 단종의 즉위를 둘러싼 당시 정치적 암투는 계유정란으로 이어졌고 계유정란의 피바람은 1만권의 장서 그리고 희귀한 그림들이 있던 정원예술 비해당을 파괴해 버렸다.

계유정란 이 후 사라졌던 ‘몽유도원도’는 1928~1929년 일본의 고 미술품상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일본의 국보로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 폭의 그림 속에 숨겨 놓았던 안평대군의 꿈과 정치적 이유 때문에 덧없이 사라져 갔던 그 시대 최고의 문인들의 찬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우리에게 다가 올수 있을지 끝없는 기다림이 너무나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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