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지하철 시청역에서 강신호 동아쏘시오그룹 명예회장을 본 적이 있다. 100세를 앞둔(망백 望百) 노령(91세)에도 꼿꼿한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다. 곁에는 수행비서도 따로 없다. 역을 나서면서도 경로우대카드가 아닌 본인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으레 전용기사에 수행원이 따라 다니는 ‘회장님’ 일상사를 지켜보는 기자의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다. 전경련 회장을 두 차례나 역임한 제약업계 산증인이자 경제계 거목치고는 너무나 큰 의외였다.

그가 올 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아들이 동아쏘시오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강정석 회장(54)은 오너 3세로 동아제약 창업주인 고 강중희 회장의 손자이자 강신호 명예회장의 4남이다. 중앙대 철학과와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하고 1989년 동아제약에 입사해 후계수업을 받았다. 경영관리팀장, 메디컬사업본부장, 동아오츠카·동아제약 대표 등을 거쳤다.

강 회장이 지난 7일 회사 자금 일부를 빼돌려 의약품 리베이트를 제공하고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구속된 첫 대기업 총수인 셈이다. 동아쏘시오그룹은 1932년 창사 이래 85년 만에 처음으로 총수 공백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매출액 기준 재계 32위 기업에 닥친 큰 시련이다.

검찰은 강 회장이 2007부터 2011년까지 법인자금 521억원을 빼돌리고 경영진에 부과된 개인 세금을 법인에 전가하는 등 총 700억원대 회사 자금을 빼돌린 것으로 봤다. 강 회장이 당시 횡령을 허위비용 처리로 감추면서 법인세를 제대로 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170억원대 조세포탈 혐의가 적용됐다.

강 회장은 지난 2009년부터 최근까지 전국 20여개의 병원 의사들에게 55억원 규모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 회사 측은 영업직원의 개인적인 일탈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베이트와 관련해서는 쌍벌제가 적용된다. 리베이트를 준 사람뿐 아니라 받은 사람까지 처벌된다. 의사 등 병원 관계자들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동아쏘시오그룹은 2013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각 사별로 전문경영인 체제 아래 독립경영을 해왔다. 회사 관계자는 “회장의 구속에 따라 우려될 수 있는 대규모 투자 및 신사업 분야에 대한 중요한 경영상의 의사 결정 등 일부 경영상의 공백은 각 사 전문경영인의 책임 경영 하에 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현 상황에 대해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해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강정석 회장의 전격 구속 후 이장한 종근당 회장에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 최근 이 회장은 운전기사들에게 욕설과 폭언을 하는 음성 녹취가 공개되면서 '갑질' 논란에 휩싸였다. 이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지낸 강신호 명예회장의 천거로 전경련 회장단 일원이 됐다. 새옹지사 인생사치고는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 만난 제약업계 한 간부는 이런 얘기를 했다. “제약업계는 산업의 특성상 갑질의 횡포와 거리가 멀다, 지금껏 한 번도 갑의 위치를 실감한 적이 없다.” 국민들이 약값에 민감하기 때문에 약값인상을 거론하기가 어렵고, 제약업은 공공재와 같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제약업계에 총수 구속과 갑질 논란이라는 악재가 겹쳤으니 업계 관계자들은 그야말로 공황상태다.

제약산업은 생명공학기술(BT), 정보기술(IT), 나노기술(NT)이 집약된 최첨단 지식기반산업이다. 신약개발을 통한 국부(國富)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기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 의약품 시장 규모는 2020년 1조4000억 달러로 예측된다. 이는 같은 기간 반도체 세계시장 규모인 4500억 달러를 4배나 뛰어넘는 규모다.

신약시장은 벤처와 같다.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는 고지혈증 치료제 리피토 하나로 2010년 129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자동차 94만 대를 수출한 효과와 맞먹는다. 한국의 제약업계도 신약시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미약품, 셀트리온 등이 활발한 연구개발을 통한 신약 개발로 성과를 냈다. 삼성이 2010년부터 바이오헬스 분야에 30조 이상 집중 투자를 하고 있다.

이번 대기업 회장들의 구속과 영장청구 사태가 갈 길 먼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불편한 과거를 마감하고 미래를 향한 분깃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는 지금 불황절벽에 맞서 일자리창출과 국익증대에 매진하고 있다. 국부창출이라는 글로벌 무한경쟁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리베이트와 갑질 논란 등 후진적 한계상황에서 헤매야하는지 답답하고 안타깝다.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퇴보하는 거다. (불일신필일퇴 不日新必日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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