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1592년 - 한산도 대첩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날이다. 이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다. 한산도대첩은 살수대첩·귀주대첩·행주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으로도 불린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 7월까지 육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사천·당포·당항포·율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이에 일본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려 병력증강을 시도했다. 이순신도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이순신의 함대와 이억기·원균의 함대가 협력해 55척의 배가 8월 13일 당포에 이르러 대전을 준비했다.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조선 해군이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잘 유인한다면 판옥선 5~6척 만으로도 적군을 격멸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한산도대첩 당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전략대로 한산다 앞바다까지 유인됐고 조선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일본 수군을 대파했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고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승리로 끝났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한산도대첩으로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000명~5000명 중 상당수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산도대첩은 행주대첩과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됐다.

사진=뉴시스

1947년 - 파키스탄 독립기념일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파키스탄은 당시 인도와 합쳐져 있었으나 종교적 이유로 인도로부터도 분리 독립했다.

파키스탄은 혼란의 정치사를 가지고 있다. 독립 이후 1947년 10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면서 1956년 공화제로 이행됐다. 1958년에는 군사 쿠테타가 발발하기도 했다. 또 1965년 8월부터 9월23일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71년 12월 3일부터 12월 16일까지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는 등 수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어왔다.

1971년에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동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서파키스탄만이 남게 되었고 이 전쟁의 영향으로 아히야 칸 대통령이 사임하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선출됐다. 이로써 13년 군정 시대가 종식됐다.

그러나 1979년 무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쿠데타로 부토 총리를 사형시키고 대통령이 됐다. 하크는 독재자로 군림하며 카리스마적이고 인기를 얻었으며 각국간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했으나 1988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이슬람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베나지르 부토가 선출됐으며 2번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부패 혐의로 모두 실각했다. 이후 1999년 5월 인도와 카슈미르 분쟁이 발생했다. 또 1999년 10월 12일에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다가 2007년 선거를 앞두고 베나지르 부토가 폭탄 테러로 사망한 뒤 2008년 8월 18일에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임하고,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이었던 자르다리가 새대통령에 당선됐다. 파키스탄은 2013년 5월 11일에 총선이 있었으며 총선은 야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사진=뉴시스

1980년 -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재야인사 24명 첫 재판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신군부세력이 조작한 사건이다.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한 20여 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를 씌워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이 때 김대중·김종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했다. 김대중과 재야인사들이 학생·노조 등을 배후 조종해 광주 민주화 운동 등 내란을 일으켰다는 혐의다. 당시 신군부는 두달여의 고문을 통해 관련자의 진술을 조작해내기도 했다.

이후 1981년 1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법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최후진술은 국제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전두환에게 친필 ‘앙망문’을 보내며 비록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정치판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며 선처를 구하기도 했다.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 행정부, 미국 의회,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한 세계 각국 지도자와 종교인, 인권단체들이 김대중의 사형 중단에 대한 압력을 가하면서 1981년 1월 23일 김대중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후 2004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됐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