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인간 소모품

〈전편 이어서〉

“아니, 이건 정말 내 체험이야. 진짜 야릇해. 여자는 길고 고불고불한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하얀 얼굴이 좀 외로워 보였어. 몸에 딱 맞는 검정색 원피스를 걸쳐 가냘프면서도 육감적인 몸매가 잘 드러났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모습이었어.” “매춘부였나 보네 뭐.”

“그런 평범한 얘기라면 애당초 내가 꺼내질 않지. 여자는 어두운 빛이 깃든 큰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앵두 같은 입술로 묻더군. ‘어디로……?’ 가능한 여운을 남기며 나는 대답했지. 여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어. ‘눈이 참 쓸쓸해 보이는구나.’ 그 순간 나는 양갈래 길에서 반평생 동안 할 고민을 다 한 것만 같아. 삶이냐, 죽음이냐?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애들을 홀려 데려가서 도끼나 톱으로 팔다리를 잘라낸 뒤 불쌍한 앵벌이 노릇을 시킨다고 들은 적이 있거든. 정말 심장이 떨리더군. 그 천당과 지옥이 엇갈릴 찰나 속에서 갈등하던 나는 선뜻 한 걸음 내딛어 그녀의 팔짱을 꼈어. 운명적인 그 순간 나를 나서게 한 것은 바로 알랑 들롱이었지.”

“뭐?” “만일 여러분들이 그가 처음부터 스타였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야. 그도 엑스트라 비슷한 단역을 맡은 무명배우 시절을 거쳤어. 그러던 어느 날 할리우드 최고의 미녀 배우가 프랑스를 방문한 기횔 그는 이용하기로 했지. 뒷골목 패거리 몇과 함께 공항으로 나간 그는 꽃다발을 뒤에 숨긴 채 기다리고 있었어. 마침내 유명 여배우가 트랩을 내려 걸어 나왔어. 수많은 방송사 기자들이 카메라를 앞세운 채 대기하는 중이었지. 그 순간 알랑 들롱은 깊은 숨을 속으로 천천히 들이쉬었어. 죽느냐 사느냐, 어릿광대가 되느냐 화제의 신예 배우가 되느냐, 환호성이 일어나느냐 마피아의 총탄이 기다리느냐 하는 위기와 기회의 순간!…… 마치 부산역 광장에서 내가 그런 것처럼 알랑 들롱은 한 여인을 향해 걸어 나갔어. 어찌 됐을까, 응? 우수 어린 독특한 미소를 지으며 장미 꽃송이를 내밀자 천만뜻밖에도 인기 최고의 여배우는 더 화려한 꽃다발들을 무시하고 무명배우의 장미 한 송이를 받아들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거야.”

“얌마, 아랑 드롱! 내 고향이 삼천포라 이런 소릴 안 할라 캤는데, 제발 더 이상 삼천포로 빠지질 말고 진주든 부산이든 니 갈 길로 가거라, 자슥아!” “알았어. 그녀를 따라 간 곳은 송정인지 송도인지 하는 바닷가 산자락에 위치한 하얀 별장이었어.”

“흥, 이제야 제 구멍을 찾아가는군. 그래서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몇날 며칠 밤낮을 잊은 채 안고 뒹굴며 미망인의 욕정을 채워 줬다는 얘기 아녀?” “물론 섹스도 하긴 했지. 하지만 그녀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런 색녀는 아니었어. 차라리 젊은 욕정을 못 이겨 색골처럼 군 나를 욕해 줘. 그녀는 무분별한 내 정욕을 부드러운 몸으로 리드하면서 섹스엔 정신적인 환희도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어. 희미한 미소로…….”

그는 추억에 젖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바닷가 기암절벽에 밀려와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바라보다가 내 눈을 그윽히 쳐다본 그녀는 다시 망망대해로 눈길을 돌린 채 말하더군. 자신은 이 세상에 혼자뿐이라고…… 백사자 왕의 첩이 된 내력을 난 파도 소리에 섞여 들었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며칠 후에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 아저씨의 사탕 꾐에 빠져 어느 거대한 저택 속으로 납치되었대. 죽는 줄 알았더니 마치 공주처럼 대접하더래. 고아원에서 자란 어린 그녀는 때를 깨끗이 빼고 난 뒤 우아한 옷을 입고 어떤 아줌마가 차려 준 최고급 음식을 늘 먹었대. 커다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 봐도 놀라울 정도로 예뻤다더군. 그런 어느 날 연청색 안경을 쓴 어떤 자그마한 남자가 거울 속에 비치더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포마드를 발라 단정히 꾸민 그는 소녀의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기, 정말 매혹적이야.’ 라고 말하더래. 그에게서 풍겨 오는 진한 냄새가 싫었지만 어린 소녀는 거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대. 그 후부터 그 노신사는 매일 밤마다 소녀의 방으로 와서 한 이불 속에서 잤다고 하더군. 무려 20년 동안이나…… 그런데 껴안고 매만지긴 해도 처녀성을 더럽히진 않았대. 아마 고자였던가 봐. 그 소녀는 사춘기를 거쳐 아가씨로 성장하는 동안 한번도 외출을 하지 못하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다더군. 창문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 외엔…….”

추억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계속했다. “그 원숭이 같은 남자는 부산 경남권을 주름잡는 폭력단인 불가사리 파의 두목이었대. 그는 남항에서 가까운 문현동 근처에 옛날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감춰 놓은 보물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곤 그걸 찾는 데 혈안이 돼 버렸다더군. 금괴가 최소한 1천 톤 이상이라고 하니 어쨌든 미칠 만도 하지. 일본군은 원래 그곳 지하에 깊고 어마어마하게 넓은 굴을 파곤 어뢰 만드는 비밀 군수공장을 차렸다는 거야. 그러다가 전쟁이 불리해지자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각지의 귀한 보물을 깡그리 약탈하여 일본에 가까운 그곳 굴속에 숨겨 놓았대. 이건 야쿠자 본부 조직에서 흘러나온 극비 정보라 불가사리 파의 두목인 백사자왕도 비밀리에 탐사를 시작한 거라. 입구는 찾지도 못한 채 땅 위쪽에서 1년 동안 여기저기 겨우 작은 구멍을 뚫어 갈고리를 넣어 본 끝에 달려 나온 건 거무스레 썩은 해골과 손가락 뼈였대. 그건 아마 어뢰 공장을 다 지은 후 비밀을 위해 몰살해 버린 징용 인부들의 유골이 아닐까? 씨발, 진시황이나 우리 임금 놈들도 그런 짓을 저질렀잖아.”

“그래서, 계속 듣고 있어야 해?” 누군가 말했다. “흠, 일단 해골이 나왔으니 황금도 어딘가에 있으리라 하고 영화 황금광시대에 나오는 미치광이들처럼 불가사리 두목과 함께 헤매고 다닌다더군. 그 바람에 그녀는 처음으로 별장에서 나와 시내까지 하염없이 걸어 나왔었다고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어. 그녀는 내 손을 꽉 쥐었어. 파란 실핏줄이 비치는 가녀린 손으로…… 지평선을 쳐다보며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문득 ‘유리창 속에서 인형처럼 슬프게 산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첫 외출에서 만난 너와 어설픈 사랑 흉내를 내다가…… 진짜 바다와 저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만하면 됐어, 그래 됐어……’ 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군. 그러더니 푸른 바다 같은 눈을 돌려 날 보았어. ‘저 파도 속으로 함께 뛰어들까? 호호……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 하지만 우린 영영 함께 할 순 없는 운명이야. 왜 그렇게 남자가 눈물까지 보여, 응? 어차피 그럴 바엔 서로 아쉬움을 가슴속에 나눠 가진 채 헤어져 언제까지나 그리워하는 게 좋아. 이미 의심을 샀기 땜에 넌 여기 더 있다간 죽어. 그러니 누굴 만나면 누나가 아프다고 하곤 급한 척 슬쩍 빠져 나가야만 해. 난 여기 좀 더 앉았을 테니까 어서 가 봐. 절대로 뒤돌아보지도 말고 한눈 팔지도 말고 곧장 가, 안녕……’ 하며 재촉했어. 난 죽더라도 그곳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그녀의 소망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몸을 일으켜 슬슬 재빨리 움직였지. 해안선을 따라 난 험한 길로만 걸어 안전지대에 닿은 순간 그쪽을 돌아다보았어. 그런데 그녀는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지 않겠니. 마치 꽃잎처럼…… 봄이면 목련이나 동백꽃이 떨어져 바람에 날릴 때마다 난 석상처럼 서서 그녀를 생각해.”

얘기꾼이 기대했던 만큼 감동의 물결은 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구려 영화 찍느냐는 따위의 야유도 없었다. 그건 아마 꽃처럼 피고 지는 영원보다는 당장 생사 앞에 선 절박함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서서 노가리를 까거나 유명 가수를 흉내 내 청중을 웃겨 보는 치는 몇 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이름만 밝힌 뒤 벽에 기대거나 동료의 어깨에 기댄 채 구경이나 했다.

밤은 묵묵히 깊어가고 두견새 울음소리만 목에 피를 문 듯 구슬펐다. “음, 내가 피날레를 장식해야겠군.” 한 녀석이 나섰다. “김 빠진 맥주 같은 소릴 했다간 꿀밤 한 대씩 맞을 각오하고 시작허더라고.”

욕정

“걱정 붙들어 매. 감질만 나는 것보단 아예 포르노가 낫겠지. 한데 이건 19금 급이라 새파란 애송이 친구들이 기절할지 몰라 걱정이네.” “어서 시작이나 해 봐. 밤도 꽤 늦었구먼.”

“음, 난 그때 충무로 뒷골목의 작은 인쇄소에 다니고 있었기에, 그 근처인 필동에 어느 아담한 집 구석방을 월세로 얻어 지냈어. 너무 조용해 남산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지. 난 교도소 교정직 공무원이 돼 볼 요량으로 어린 나이인데도 계획표를 벽에 붙여 놓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밤에 책을 펴 놓고 공부하다 보면 주인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자꾸 들려오는 거야. 애완용인지 넓은 마당을 놔두고 방안에서 키우더군. 나도 사실 개를 좋아하기에 마이동풍으로 넘기기도 하고 우공이산으로 참아 보기도 했지. 하지만 개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점점 커지면서 공부를 방해했어. 가만히 분석해 보니까, 원래 개는 그렇게 짖었는데 내가 처음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아. 사실 밖에 서서 듣는 소리와 방안에서 공부하며 듣는 소음은 아무래도 천지 차이거든. 그래도 죄인을 교도하는 직업을 가지려는 내가 너그럽게 포용해야지,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고 참았걸랑. 그런데 개놈은 한 조각 양심마저 없는지 점점 더 기승을 부렸어. 공부를 집어치우고 잠이라도 좀 자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더 앙살맞게 짖어대더군. 그래도 주인은 말리질 않는 거야. 오히려 마치 애처럼 어르고 달래고 하니 더 지랄이었지. 여름철이라 창문을 열어 놓으니까 마치 옆에서 마이크를 들고 무슨 개소리로 연설을 하듯 극성스러워 곧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개새끼보다 개주인이 더 얄미운 거야. 개가 짖을 때마다 대가릴 한 대씩만 때려 주면 좋을 텐데 자꾸 달래기만 하니 개가 얼씨구나 하고 오히려 주인을 조롱하는 꼴이 된 거지. 어느 날 밤, 난 견디다 못해 마당 앞의 계단을 올라 하얀 현관 앞으로 갔어. 왜 개새끼 한 마리가 애써 살아 보려는 내 인생의 앞길을 막는가? 왜 사람이 잠깐 고성방가를 하면 잡아가면서 개 한 마리가 짖어대 주위 사람들을 괴롭혀도 막을 방법이 없는가?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 등등 선진국에서는 경범죄 감으로 법적 조치를 한다는데 왜 대한민국은 애완견보다 사람이 더 무시를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 개 같은 민주공화국은 개 같은 인간이 더 많이 살아서 그런가? 여러 가지 의문을 품은 채 현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노크를 했어. 개가 먼저 앙칼지게 짖어대고 나서 한참이 지나 현관문이 열리더군. 그곳에 여자가 산다는 건 알았지만 몇 달 동안 뒷모습을 겨우 한번 슬쩍 봤을 뿐이야. 그런데 문틈으로 반쯤만 보이는 얼굴은 그닥 착한 인상은 아니었으나 잠기 남은 게슴츠레한 눈이나 작은 입술이 제법 예쁜 편이었어. 용건을 밝히니까…… 대뜸 싫으면 나가라는 거야. 그 순간 머리가 빡 돌더군. 그리고 그동안 숱한 밤에 꾼 꿈이 소용돌이쳤어. 난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억지로 문을 밀고 들어갔지. 발악하는 하얀 스피츠의 주둥이를 걷어차니깐 켁 하곤 나뒹굴더군. 목을 꽉 밟자 조용해지는데 갑자기 여자가 마치 본인이 살해당하는 듯 새된 비명을 질러대더군. 잭나이프를 꺼내 개의 골통에 찔러 놓고 물었어. 이것처럼 시체가 될래요, 조용히 하고 내 말대로 할래요? 여자는 스피츠가 죽기 전처럼 떨며 고갤 끄덕이더군. 난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가느다란 개피를 하나 뽑아 불을 붙이곤 물었어. ‘애완견을 키우는 건 좋습니다만, 이웃에 피해를 주진 않아야죠. 그렇죠?’ ‘그러니까…… 싫으면 그냥 나가 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방세를 냈으니 나도 여기 살 권리가 있어. 무엇보다 눈꼴사나운 건 개에게 나라는 한 인간의 꿈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개를 자식처럼 품에 안거나 등에 업거나 예쁘게 치장시켜 유모차에 싣고 다니는 걸 보곤 사람인 줄 알고 난 깜짝 놀랐어요. 그건 괴상스럽지만 뭐 개인의 취향이라고 쳐둡시다. 하지만 남의 취향도 존중해야죠. 조용히 짖도록 훈련을 제대로 시키거나 성대 수술을 하거나 알람 목걸이를 채우는 등 방법이 많은데도 왜 계속 개 멋대로 짖게 하나요?’ ‘나한텐 사람보다 더 소중해요.’ ‘왜, 왜!’ ‘당신한텐 한 마리 개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겐 마음의 벗이에요. 사람이 채워 주지 못하는 정을 주니까요. 내가 사람들에게 당한 스트레스를 다 받아 줬어요.’ ‘그 개의 스트레스는 내가 다 받았는데도?’ ‘그건 내 알 바 아녜요. 정 고까우면 이런 행패를 부리기보단 경찰서에 신고하면 되잖아요.’ ‘나도 다 알아 봤어. 그런데 아직 처벌할 법이 없대. 국회의사당에 가서 청원이라도 해보라고 조언해 주더군.’ ‘나라에서도 허락하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지랄이에요? 살인마 같으니!’ ‘그럼 지금부터 진짜 개지랄을 해야겠군요.’ 난 여자의 발목을 줄로 묶어 둔 뒤 개의 목을 자르고 털가죽을 벗겨냈어. 여자는 손가락으로 눈을 가린 채 흐느끼더군. 배를 갈라 내장을 긁어내고 다리를 잘라 버렸어. 어찌 보면 나무토막 같기도 한 그 물체는 ‘컹컹, 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설령 개 같은 나쁜 짓이었더라도……’ 라고 무언의 항변을 하는 듯하더군. 그것을 토막토막내 놓고 나는 간을 집어…… 전에 이를 갈며 상상했듯 질겅질겅 씹으면서 여자에게 말했어. ‘냄비에 넣어 푹 삶아. 내장도 깨끗이 씻어서 넣으면 맛이 날 거야.’ 난 바람 쐬러 가는 척 슬며시 나갔다가 급히 소주 한 박스를 사 와 마루에 던져 놓았어. 여자는 살기를 느꼈는지 의외로 고분고분 개장국을 끓여 내놓더군. 나는 소음의 고통 속에서 공상을 하며 작정했듯, 겉옷을 벗어 던지곤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앉아 소줄 마시고 개고기를 쩝쩝 씹어 먹기 시작했어. 그렇게 짖어대던 놈은 삼키는 족족 소화돼 에너지를 솟게 하더군.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쓴 눈으로 노려보다가 갑자기 외면하는 둥 발작 일보 직전이었어. ‘그러니 그 전에 이웃에 대한 생각을 조금쯤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너 좋은 대로 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해보겠다!’ 나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여자를 안아 들고 바로 옆의 아늑한 방으로 가서 침대에 던져 놓았어. 그리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옷을 찢어 벗겨 알몸뚱이로 만들었지. 희고 보들보들한 그 몸을 덮치자 그녀는 한 순간 토끼처럼 흠칫 놀라더니 곧 가슴만 팔딱거리며 가만히 있었어.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입으로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빨자 앙탈을 부리더니 콧구멍을 끈적끈적 핥으니까 숨이 가쁜지 엉겁결에 혀를 살짝 내밀더군. 그걸 붙들어 문 채 세차게 흡입하자 조금씩 빨려 들어오더군. 나는 증오심과 함께 변질된 모종의 애정을 섞어 그녀를 유린하기 시작했어. 입술이 서로 접촉한 뒤부터 여자의 앙탈은 한풀 꺾였지만 냉랭한 기색이 깃든 무표정한 얼굴로 변하더군. 몸도 차츰 차가워지는 느낌이었지. 만일 그녀가 눈물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면 어쨌을지 모르지만…… 전혀 그러질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내 눈에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암캐로 보이더군. 이런 짓은 나쁘겠지만, 이러지 않으면 또 언제 개를 사서 도도하게 사람을 괴롭히겠지…… 난 차라리 죄악을 짓고 싶었어. 설빙 같은 그 살갗도 내 몸에 양기가 차올라 뜨거우니 오히려 삼삼허니 괜찮더라구. 그때부터 기나긴 섹스의 향연이, 만리장성의 대장정이 시작되었어. 복수를 하듯 강력하게 조졌지. 어랍쇼! 그런데 진짜 비명을 내지르는 거야. 여우같이 생긴 것과 달리 숫처녀였나봐. 난 더 강하게 밀어붙였지. 신음소리는 고통인지 쾌감인지 분간키 어려웠지. 난 일단 스톱하고 내려왔어. 슬쩍 보니 침대 시트에 피가 묻어나 있더군.”

작가- 김영권

진주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으며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다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仙甘島 수용소의 비밀」 「보리울의 달」 등이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취재해서 르포 「시장의 하루」 「보통사람들의 오아시스」등을 썼다.

현재는 「지옥극장」 시리즈 제3탄 「몽키하우스」를 집필중이이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진실을 찾아 드라마틱하게 소설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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