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IT 강국이다. 컴퓨터·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산업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이 초고속 네트워크망으로 연결돼 있다. 국민 개개인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긴밀히 연결돼 있고 IT 활용능력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세기 후반 전신이 개통된 이래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황제는 전화의 혜택을 누린 유일한 왕으로 남았다. 이후 일제 치하에서 통신 산업이 잠시 주춤했지만 산업화시기를 지나면서 전화기 보급, 통신 시설 기반 구축, 위성통신 발달 등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이후 삼성·LG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자기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하드웨어적 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또 전자기기를 제대로 구현해낼 소프트웨어격인 통신 기술도 세계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결합돼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IT 강국이 됐다. 경제비사 제15탄은 19세기 말 고종황제의 전화기부터 21세기 초고속 기가 와이파이 시대까지 대한민국 통신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근대적 전기통신의 역사는 1885년 한성과 제물포 간 전신이 개통되면서 시작된다. 이후 1902년 동일 구간에 전화가 개통되면서 본격적인 전화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다. 또 한성전화소에서 전화교환업무를 시작해 시내전화업무가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특히 고종황제는 궁궐에서 전화를 애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궁내부에 전화가 설치되면서 고종과 궁내부 신하들은 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다. 고종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들과 통화를 했고 전화를 받은 대신들은 걸려오는 전화에 큰 절을 네 번 올리고 공손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일제시대에는 일본에게 통신권을 빼앗겨 통신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방 이후 1952년 대한민국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했고, 1965년 가입전신(텔렉스) 업무를 개시해 경제개발을 위한 효과적인 통신인프라 조성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서울과 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DDD)가 개통됐다. 1975년에는 가입전화시설이 100만 회선을 돌파했다.

전화교환원

통신 기술이 발달해 자동식으로 바뀌기 이전에는 전화를 연결시켜 주는 교환원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교환원은 고객으로부터 전화신청을 접수해 착신국의 교환원을 연결하거나 가입자의 번호를 선별해 전화를 교환·접속하는 일을 수행했다.

일반전화교환원은 KT의 직원으로서 각 지역 전화국에서 교환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시내·시외통화 접수 및 교환업무에 종사하고 그에 따른 접수기록대장·통화요금표·발신증 등 각종 서류를 업무에 따라 기록, 정리하는 일도 했다.

당시에는 전화기가 보급되지 않아 돈이 많은 부자나 상류층만 전화기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전화기 보유 가구 수가 적었기에 교환원이 일일이 교환을 담당해주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가정마다 전화기가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80년대에는 교환원 없이 바로 전화연결이 가능한 자동시스템으로 바뀌게 된다.

전화기 보급

1902년 전화가 개통된 이래 약 70년간 전화기는 부의 상징이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전화를 위한 통신 기반 시설이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전화기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80년대 들어 대부분의 가정에 유선전화기가 보급됐다. 통신 기반 시설이 점차 구축됐고 자동 전화 시스템이 도입됐으며 87년에는 1000만 회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1가정 1전화 시대를 연 것이다.

각 가정에 전화기가 보급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집 밖에는 ‘공중전화’가 있어 국민들의 통신 갈증을 해소해줬다. 공중전화는 1920년대 처음 설치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이전까지는 시내통화만 가능했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편의성 때문에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생소하지만 80~90년대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줄을 서서 공중전화를 기다리는 풍경도 익숙한 전경이었다. 공중전화는 동전을 넣으면 일정 시간 통화가 가능했으며 남는 금액은 거스름돈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후 공중전화카드가 등장하자 국민들의 필수 소지품이 되기도 했다. 공중전화는 지금도 거리 곳곳에 남아있긴 하지만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점점 자취를 감추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세대 무선통신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무선 전화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되면서 전기통신산업의 본격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1984년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서비스 제공을 위해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가 설립됐다. 유선으로 통신하던 시대에서 탈피해 무선 통신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세대 이동통신은 ‘카폰’에서 시작한다. 최초의 상업용 휴대폰은 ‘모토로라 카폰’이었다. 차량에 설치돼 있는 전화기였지만 차량 이동 중에 통신이 가능했기 때문에 최초의 이동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카폰의 가격은 300만원을 호가했다. 참고로 당시 대학 등록금이 60만원 정도였다. 상당한 거금이었지만 매년 30%씩 성장할 만큼 카폰의 성장세는 가팔랐다. 1989년까지 2만 대 이상 보급됐다. 당시 금성전기, 대영 전기, 현대전자, 동양정밀공업 등 국내 기업들이 자동차전화를 생산했다.

PC 통신·삐삐

이동통신 개발이 한창인 가운데 90년대 들어 퍼스널컴퓨터(PC)를 기반으로 한 통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PC 통신’이란 PC와 또 다른 PC를 통신회선으로 연결해 자료를 주고받는 통신 방식을 말한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 단계의 과도기였다.

PC 통신은 1978년 미국에서 시작된 이래 1984년 데이콤의 ‘천리안’에서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처음 도입됐다. 이후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PC 통신 서비스에는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가입자 간에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자우편 서비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컴퓨터 화면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채팅 서비스, 가입자 간에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전자게시판 서비스, 컴퓨터를 이용하여 물품을 구입하는 거래처리 서비스 등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PC 통신은 1995년 데이콤(현 주식회사미디어로그)이 서비스한 천리안이다. 천리안은 회원제 인터넷 포털사이트로 각종 콘텐츠는 물론 메일, 메신저 등을 서비스하는 사이트였다. 전화선에 연결된 모뎀을 통해 천리안에 접속해 로그인하면 인터넷보다 제한적이지만 천리안에 마련된 많은 메뉴를 즐길 수 있었다. 게임, 사진, 음악 등도 이용할 수 있었고 채팅 등도 큰 인기를 끌었다. 데이콤은 1998년 인터넷 검색엔진 심마니를 인수해 인터넷 서비스를 추가 운영했다.

PC 통신은 쌍방향 소통으로 이뤄지는 새로운 정보 소통 방식을 제시해 사이버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초고속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PC 통신보다는 인터넷의 이용비율이 급속히 늘어감에 따라 급격히 쇠퇴했다. PC 통신의 대표주자였던 하이텔과 천리안은 2007년 서비스를 중단했고 나우누리도 명맥만 유지하다 2013년 1월 서비스를 종료했다.

또 PC 통신이 유행하던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는 무선호출기, 일명 ‘삐삐’의 시대이기도 했다. 삐삐는 1983년 처음으로 국내 서비스가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인기를 끈 건 1990년대부터다. 1997년에는 가입자 수가 1500만 명에 달했다. 삐삐는 누군가 전화로 호출을 하면 번호와 함께 알림음이 울리게 되고 호출을 받은 사람이 공중전화나 휴대폰을 이용해 호출한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식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연락하고 싶을 때 삐삐를 통해 신호를 남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삐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초고속 인터넷

PC 통신이 활성화되고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 빠른 인터넷 환경과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달하게 됐다. 이에 PC 통신에서 사용하던 모뎀 시대가 지나고 ADSL(Asymmetric Digital Subscriber Line)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ADSL은 비대칭형 디지털 가입자망을 뜻한다. 이는 기존의 구리 전화선을 통해 일반 음성통화는 물론 데이터 통신을 고속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ADSL은 송수신 속도의 차이(2002년 출시 당시 수신의 경우 최고 9Mbps, 송신은 640Kbps)때문에 비대칭형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ADSL은 데이터를 실어 나를 때는 음성보다 높은 주파수 대역을 이용하므로 동시에 음성통화와 데이터 통신을 할 수 있었다. ADSL은 1999년 국내에 상용화됐으며 초고속인터넷 ADSL은 이후 우리나라를 ICT 강국으로 이끄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ADSL에 이어 등장한 초고속 디지털 전송기술이 바로 VDSL(very high-data rate digital subscriber line)이다. VDSL은 기존 전화선을 이용, 고속의 데이터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기술인 디지털가입자회선(xDSL)의 최종 단계였다. xDSL 계열의 초고속 인터넷(ADSL, SDSL, HDSL, VDSL로 구분) 중 속도가 가장 빨랐다. 이는 ADSL에 비해서 2~10배 정도 넓은 대역폭의 사용, ADSL보다 짧은 거리에서 더 빠른 데이터 전송 가능 및 전송기술이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고속 통신 기술은 광케이블로 진화했다. 광섬유케이블이라고도 한다. 신호를 부호로 만든 광선을 내부반사로 전송할 수 있다. 다른 유선 전송매체에 비해 대역폭이 넓어 데이터 전송률이 뛰어나다. 근거리와 광역 통신망, 장거리 통신, 군사용, 가입자 회선 등에 많이 쓰인다. 데이터 전송속도는 최대 2.5Gbps(Gigabit/s) 정도이다.

유선전화기가 모바일로 진화하듯 전화선, 광케이블에 의존하던 네트워크 기술도 무선으로 진화해 갔다. 선이 필요 없이 기지국과 위성으로 통신하는 와이파이 기술이 개발돼 PC, 모바일 할 것 없이 초고속 기가 와이파이 시대로 접어들었다.

1987년 9월30일 김정열 국무총리 참석하에 ‘전화 1000만 회선 돌파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국가기록원

모바일 혁명

통신 기술이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겪는 사이 ‘벽돌폰’이라 불리던 휴대폰 역시 최첨단 모바일 기기로 진화했다. 최초의 휴대폰은 1988년 모토로라가 국내에 내놓은 ‘다이나택 9800’이다. 무게는 700g, 연속 통화시간은 2시간, 가격은 240만원이었다. 이후 삼성전자가 자체 기술로 SH-100이라는 모델을 출시해 1989년부터 대중에게 판매됐다. 당시 가격은 165만원.

이후 휴대폰은 다양한 형태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삼성전자는 1996년 2세대 방식의 셀룰러폰을 출시했다. 또 CT-2(시티폰)도 출시됐다. 시티폰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무선전화를 발전시킨 것으로 도시 곳곳에 설치된 무선중계가의 반경 200m 안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2.5세대에 해당하는 PCS폰이 등장했다. PCS폰은 무선전화기와 이동전화의 중간 형태로 음질이 좋고 가격도 저렴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초반 PCS 사업자들이 통폐합되고 국내에는 SK텔레콤·KTF·LG텔레콤만 남게 됐다. 통신기술과 휴대폰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3세대 일명 피처폰이 등장하게 된다.

3세대 통신 방식이 대중화되면서 아이폰의 등장으로 모바일 기기는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애플의 아이폰 3GS가 출시되고 삼성전자도 미국 시장에 SPH-M1000를 출시했다. 이후 4세대 LTE 시대로 넘어오면서 현재까지 가장 상용화된 방식으로 남아있으며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 LG G시리즈 등이 세계시장에서 선전하면서 세계 IT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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